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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개별 기업이나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를 넘어 국가 간 ‘AI 진영 선택’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자국 주도의 AI 협력체에 참여한 국가들에 중국이 주도하는 경쟁적 AI 구상과 동시에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AI 생태계가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이른바 ‘AI 블록화’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로이터통신은 14일 미국 관리와 미 국무부의 내부 서한 초안을 토대로 미국이 수십 개 국가에 AI 분야에서 어느 기술 생태계에 설 것인지 사실상 선택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서한은 지난 6월 미국의 ‘AI 기회 성명(AI Opportunity Statement)’에 서명한 35개국을 대상으로 작성됐다.
다만 이번 문서는 아직 외교적으로 전달된 최종 통보문은 아니다. 로이터가 확인한 것은 날짜가 기재되지 않은 국무부 내부 초안으로, 언제 발송될지 또는 실제 발송 과정에서 내용이 수정될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 국무부 역시 유출된 것으로 알려진 내부 문서에 대해서는 논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모든 곳에 속하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서한 초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미국은 지난해 AI 모델과 반도체, 핵심광물 등 첨단기술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팍스 실리카(Pax Silica)’ 구상을 출범시켰다. 일본·한국·호주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동맹과 파트너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를 단순한 협의체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 사이의 전략적 기술 생태계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로이터가 확인한 초안에는 팍스 실리카 참여가 단순한 회원 가입이 아니라 하나의 ‘약속’이라는 취지와 함께, 상충하는 목표를 가진 다른 유사 구상에 동시에 가입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 관리 역시 “양쪽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서한 작성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은 지난 7월 상하이 세계인공지능대회(WAIC)를 계기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를 출범시키며 미국 중심의 AI 질서에 맞서는 독자적인 국제협력망 구축에 나섰다. 출범 당시 29개국이 참여했으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오픈소스·오픈웨이트 AI 기술을 개발도상국과 공유하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AI 역량 구축을 지원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결국 미국의 접근법이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끼리 첨단기술과 공급망을 묶는 전략’이라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기술 제공과 개발도상국 협력을 앞세워 세력 확장을 꾀하는 모양새다.
카자흐스탄의 ‘양다리’가 촉발한 워싱턴의 경계
이번 논란의 중심에는 카자흐스탄이 있다. 카자흐스탄은 지난 6월 중앙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팍스 실리카에 참여했다. 첨단 반도체와 AI 산업에 필요한 상당한 핵심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국가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이후 중국 주도의 WAICO에도 참여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미국과 중국의 두 AI 협력 구상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국가다.
워싱턴은 이를 단순한 외교적 중립이나 실용외교의 문제로 보지 않는 분위기다. AI 생태계가 단지 소프트웨어나 챗봇을 공유하는 수준이 아니라 반도체·데이터센터·전력·핵심광물·첨단제조·수출통제까지 하나의 전략 체계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기술망과 미국 중심의 공급망에 동시에 깊숙이 참여하는 국가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반도체에서 AI 모델까지..기술패권 경쟁의 전선 확대
미·중 기술경쟁의 중심축 역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과거 경쟁의 핵심이 5G 통신장비와 첨단 반도체였다면 이제는 AI 모델과 AI용 데이터센터, 반도체 제조장비, 전력 인프라, 희토류와 핵심광물까지 하나의 거대한 기술안보 체계로 통합되고 있다.
특히 중국산 오픈웨이트(open-weight) AI 모델들이 빠른 속도로 성능을 끌어올리면서 OpenAI와 Anthropic 등 미국 기업들의 첨단 모델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 미국의 경계심을 더욱 높이고 있다. 로이터는 미·중 AI 경쟁이 기술적·지정학적으로 중대한 변곡점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중국 역시 ‘개방’을 내세우면서도 국가안보 문제에서는 별도의 통제 장치를 강화하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베이징은 자국의 일부 최상위 AI 모델에 대한 해외 접근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대외적으로는 오픈웨이트 기술 확산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핵심 AI 역량을 전략자산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핵심광물도 중요한 변수다. 중국이 일부 광물 공급망에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가진 상황에서 미국은 자국 생산 확대와 함께 동맹국·우방국으로 공급망을 분산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팍스 실리카에 광물 부국인 카자흐스탄을 끌어들인 것도 이 같은 전략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한국도 선택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아
한국에도 이번 움직임은 남의 일이 아니다. 미 국무부가 공개한 명단에 따르면 한국은 AI 기회 성명 서명국이자 팍스 실리카 참여국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 능력과 메모리 기술, 배터리·첨단제조 기반을 갖추고 있어 미국이 구축하려는 AI 공급망에서 핵심 국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미·중 AI 경쟁이 지금보다 더 강한 ‘기술동맹’ 형태로 발전할 경우 한국은 첨단 반도체 수출뿐 아니라 AI 모델,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핵심광물 조달, 연구개발 협력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AI 기술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과 사이버 안보, 국가 핵심 데이터 보호 문제가 커질수록 미국은 기술협력을 전통적인 안보동맹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안보와 첨단기술을 완전히 분리해 대응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AI판 신냉전’.. 세계 기술질서 양분될까
중국은 미국의 움직임에 반발하고 있다. 주미 중국대사관은 로이터에 중국이 무역과 기술 문제의 정치화에 반대한다며 이러한 조치가 세계 AI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전략 역시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AI를 일반적인 상업기술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경제력, 군사력까지 좌우할 수 있는 전략자산으로 규정하고 반도체에서 광물까지 전체 공급망을 동맹·우방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중국도 이에 맞서 자국 AI 모델과 기술표준, 개발도상국 지원을 결합한 별도의 국제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있다.
결국 향후 AI 경쟁은 어느 나라가 더 뛰어난 모델 하나를 개발하느냐의 싸움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를 누가 생산하는지, 핵심광물을 누가 공급하는지, 어떤 AI 모델과 클라우드를 사용하는지, 어떤 국가들과 데이터를 공유하고 기술표준을 맞출 것인지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기술권역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 국무부의 이번 서한 초안은 그 변화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때 각국이 미·중 양국과 경제협력을 병행하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AI 시대에는 그 공간이 빠르게 좁아질 수 있다. 세계의 첨단기술 질서가 이제 ‘누구의 AI를 사용할 것인가’를 넘어 ‘어느 기술 생태계에 속할 것인가’를 묻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안·희·숙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