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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마오쩌둥이 남긴 광기의 유산.. 옛 홍위병 “우리는 우롱당했다”

2026-09-10 22:54 | 입력 : 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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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대혁명 60년, ‘혁명의 전위’였던 청년들의 뒤늦은 참회

인터넷 캡쳐
인터넷 캡쳐

“우리 같은 홍위병들은 우롱당했다.”

1966년 마오쩌둥이 시작한 문화대혁명으로부터 60년. 당시 ‘혁명의 전위’를 자처하며 중국 전역을 공포와 폭력으로 몰아넣었던 홍위병 출신들의 뒤늦은 증언과 참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따르면 올해 73세인 딩쉐량 홍콩과기대 명예교수 역시 문화대혁명의 한복판을 통과한 홍위병 출신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66년 13세도 되기 전에 안후이성 쉬안청 지역 급진파의 선전 책임자로 발탁됐다.

딩 교수는 훗날 자신과 같은 청소년들이 마오쩌둥의 정치적 목적에 철저하게 이용됐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 같은 홍위병들이 우롱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며 당시 청년들의 순진함과 이상주의가 최고지도자의 권력투쟁에 동원됐다고 증언했다.

“사령부를 포격하라”…청년을 권력투쟁의 돌격대로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의 참혹한 실패 이후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던 마오쩌둥이 당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대규모 정치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은 “사령부를 포격하라”, “반란에는 정당성이 있다”는 과격한 구호를 내세워 청년들을 선동했다. 자본주의와 수정주의 세력이 공산당 내부에 침투했다며 학생들에게 교사와 지식인, 당 간부들을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 이념교육을 받아온 청소년들은 이러한 선동에 쉽게 휩쓸렸다.

딩쉐량 역시 난징에서 홍위병 운동과 처음 접촉한 뒤 대자보와 전단 작성, 이른바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폭로하는 방법을 익혔다. 공격 대상에는 자신의 스승도 포함됐다.

그는 직접적인 폭력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회고했지만 당시 비판투쟁 대상자들의 목에 무거운 ‘수치패’를 걸고 공개적으로 모욕하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무거운 패를 고르거나 가는 쇠사슬로 목을 조이는 방식까지 동원됐다는 것이다.

대자보에서 총격전으로…‘혁명’이 만든 내전

광기는 곧 무장충돌로 번졌다.

딩쉐량이 살던 쉬안청에서는 ‘홍본부’와 보다 급진적인 ‘반란지휘부’가 서로를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하며 충돌했다. 딩이 속했던 반란지휘부는 상대편을 마오쩌둥이 타도 대상으로 지목한 ‘보수주의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대자보와 공개비판으로 시작됐지만 충돌은 곧 물리적 폭력으로 확대됐다. 군부대에서 유출된 총기까지 등장했고 실제 사망자가 발생했다.

딩 교수는 훗날 당시 중국에는 외부의 침략도,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전쟁도 없었다며 “새로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인끼리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는 거대한 혼란만 벌어졌다고 평가했다.

이 경험은 그가 이후 문화대혁명과 정치사회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어머니까지 고발한 홍위병…두 달 뒤 총살

문화대혁명의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2013년 전 홍위병 류보친은 중국 잡지 『염황춘추』에 공개 사과문을 게재했다.

같은 해 장훙빙이라는 전 홍위병은 1970년 자신의 어머니를 정치적으로 고발했던 일을 공개했다. 그의 고발 이후 어머니는 체포됐으며 두 달 뒤 총살됐다.

중국인민해방군 원로의 아들이었던 천샤오루 역시 자신의 과거를 공개적으로 반성했다.

1966년 베이징의 한 중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교사들에게 종이로 만든 이른바 ‘당나귀 모자’를 씌우고 교장을 거리로 끌고 다니며 공개적인 모욕과 폭행을 가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학교 당지부 서기 화진은 저장실에 2주 동안 감금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한 부서기는 폭행 후유증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끓는 물과 못 박힌 몽둥이…교장은 끝내 숨졌다

2014년 전 홍위병 쑹빈빈 역시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그가 재학했던 학교에서는 홍위병 학생들이 교장 변중윈을 끓는 물과 못이 박힌 몽둥이 등으로 학대하고 폭행했다. 화장실 청소를 강요하고 오염된 물까지 마시게 했으며 결국 변 교장은 목숨을 잃었다.

문화대혁명에서 ‘계급의 적’으로 찍힌 사람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다.

교사와 지식인, 공무원은 물론 가족과 이웃까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했다. 개인적 원한과 정치적 광기가 결합하면서 무고한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반혁명분자’가 됐다.

“학생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너무 늦게 찾아온 사과

뒤늦은 화해도 있었다.

전 홍위병 위샹전은 1990년 동창생들과 함께 문화대혁명 당시 자신들에게 모욕당했던 교사 장지란을 찾아가 사과했다.

장 교사는 과거 학생들에 의해 소 우리에 갇혀 개 흉내를 내도록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옛 제자들은 20여 년이 지나서야 장 교사와 다시 만나 양털 숄을 선물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장 교사는 오히려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장 교사는 세상을 떠났다.

위샹전은 이후 문화대혁명 경험을 인터넷에 지속적으로 기록했지만 중국 당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73세인 그는 은퇴 후 말레이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가해자이자 세뇌의 피해자였던 홍위병

문화대혁명의 가장 비극적인 특징은 수많은 홍위병이 가해자인 동시에 극단적인 이념교육의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10대 청소년들은 마오쩌둥 개인숭배 속에서 지도자의 말이 곧 진리라고 배웠다. 그 결과 스승을 공격하고 부모를 고발하며 친구와 이웃을 ‘계급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조차 혁명을 위한 정의라고 믿게 됐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뒤 일부 홍위병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혁명’이 결국 마오쩌둥의 권력투쟁을 위해 이용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우롱당했다”는 딩쉐량의 고백은 한 개인의 후회를 넘어 문화대혁명이 어떻게 한 세대의 청년을 정치적 폭력의 도구로 바꾸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중국공산당, 과오는 인정했지만 기억은 통제

중국공산당은 1981년 역사결의를 통해 문화대혁명을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으로 규정하는 등 일부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구체적인 가해와 피해, 최고지도자의 책임을 둘러싼 자유로운 연구와 공개 토론은 지금도 민감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가해자들의 공개적인 사과 역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문화대혁명이 남긴 교훈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지도자 개인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와 극단적 이념이 결합하고, 그것이 청년 세대의 정의감과 순수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때 한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폭력과 광기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홍위병들이 수십 년 뒤 내놓은 참회의 말은 짧지만 무겁다.

“우리는 우롱당했다.”

그러나 그 정치적 기만의 대가는 수많은 중국인의 목숨과 파괴된 가정, 그리고 아직까지 완전히 말해지지 못한 문화대혁명의 상처로 남아 있다.

장·춘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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