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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있다.
1976년 9월 9일 사망한 마오쩌둥은 생전 ‘위대한 키잡이’로 불렸다. 당시 중국은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혼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학교와 공장, 국가기관과 가정까지 정치투쟁에 휘말렸고 수많은 중국인이 박해와 폭력, 사회적 혼란을 경험했다.
50년 뒤 중국은 전혀 다른 국가가 됐다. 세계 2위 규모의 경제력을 갖추고 고속철도와 인공지능, 우주항공 등 첨단산업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곳곳에서 마오쩌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는 거대한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려 있고 중국의 인민폐에도 그의 얼굴이 남아 있다. 마오주석기념당 앞에는 지금도 참배객들이 줄을 선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초상화나 기념관이 아니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역사관과 국가 통치 방식, 지도자와 권력에 대한 정치문화 속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경제체제는 무너졌지만 ‘당의 국가’는 남았다
마오쩌둥의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는 1949년 이후 구축된 중국의 정치구조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은 소련식 계획경제와 고도로 집중된 당·국가체제를 도입했다. 공산당 조직은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 농촌, 공장, 학교와 직장으로 침투했다.
개인의 직장과 주거, 교육, 사회적 지위까지 국가와 조직에 연결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1970년대 말부터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이러한 경제체제는 크게 해체됐다. 인민공사가 사라지고 시장경제와 민간기업이 성장했으며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변하지 않았다. 바로 중국공산당의 독점적 지배였다. 경제는 마오쩌둥 시대를 벗어났지만, 정치적으로는 마오 시대에 구축된 당 중심 국가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대약진·문화대혁명…지울 수 없는 재앙의 책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신중국의 창건자’라고 선전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비극에 책임을 져야 할 지도자이기도 하다.
1957년 반우파운동에서는 수많은 지식인이 ‘우파’로 몰려 숙청과 박해를 당했다. 이듬해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무리한 생산 목표와 농업 집단화, 허위보고 등이 겹치며 대규모 기근을 초래했다. 수천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더욱 파괴적이었다. 홍위병을 앞세운 정치투쟁 속에서 지식인과 관료, 교사, 종교인과 평범한 시민까지 공격당했고 중국의 교육·문화·경제·사회질서가 10년 가까이 붕괴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1981년 중국공산당은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이 말년에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공적이 과오보다 크다’는 평가를 확정했다. 이것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 평가에 사실상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됐다.
“마오는 레닌이자 스탈린”
소련에서는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숙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혁명의 창시자인 레닌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는 같은 방식이 불가능했다.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레닌이면서 동시에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혁명의 최고 지도자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였으며, 동시에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의 최고 책임자였다. 마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순간 문제는 개인의 잘못을 넘어선다.
1949년 혁명 자체가 정당했는가, 중국공산당의 일당지배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얻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공산당에게 마오쩌둥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현재의 체제 정당성과 직결된 정치적 존재다.
덩샤오핑의 타협…경제적으로 버리고 정치적으로 남기다
마오 사후 중국이 선택한 해법은 독특했다. 경제적으로는 마오쩌둥과 결별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마오쩌둥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꾸고 외국 자본과 민간기업을 받아들이면서도 공산당의 독점적 권력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 결과 오늘날 중국의 거리에는 명품 매장과 첨단 전기차가 넘쳐나지만 정치적 권력구조는 여전히 일당체제다. 이는 현대 중국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다.
시진핑 시대, 다시 강화되는 마오의 역사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이러한 역사적 연속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시진핑은 2013년 이른바 ‘두 가지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를 근거로 개혁개방 이전 시기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마오 시대를 근거로 개혁개방 이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상 마오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를 하나의 중국공산당 역사로 묶는 논리다. 공식 역사에서는 마오 시대가 산업과 교육, 국가조직의 기반을 만들었고, 개혁개방이 그 위에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식의 서술이 강화되고 있다.
결국 오늘날 중국의 성공을 ‘마오를 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공’으로 해석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다시 중국공산당의 현재와 미래를 정당화하는 역사 속으로 소환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다시 찾는 ‘마오의 평등’
흥미로운 것은 일부 중국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마오쩌둥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반드시 계획경제나 문화대혁명의 부활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주로 마오 시대가 내세웠던 ‘평등’이라는 상징이다.
높은 집값과 취업난, 극심한 경쟁, 빈부 격차와 계층 이동의 어려움에 직면한 일부 젊은 세대에게 마오쩌둥은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상징으로 다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사적 기억의 선택성이 존재한다.
마오 시대의 상대적 평등만 강조하면서 당시의 절대적 빈곤, 정치적 박해, 표현의 자유 억압과 개인의 권리가 철저히 국가에 종속됐다는 현실은 쉽게 사라진다.
오늘날 일부가 기억하는 ‘마오쩌둥’은 역사 속의 실제 마오쩌둥이라기보다 현실에 대한 불만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상징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마오를 이야기하는 순간 ‘권력의 통제’ 문제가 나온다
중국공산당이 마오쩌둥 문제를 민감하게 다루는 이유는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의 피해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마오 시대를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결국 정치권력의 구조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왜 한 사람의 판단이 수억 명의 삶을 뒤흔들 수 있었는가.
왜 잘못된 정책을 중단시킬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왜 최고지도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불가능했는가.
그리고 만약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오늘의 중국에는 그것을 막을 장치가 존재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역사적 논쟁은 오늘날 중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질문으로 바뀐다.
5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유령
마오쩌둥이 죽은 지 50년이 됐다.
중국의 경제는 변했고 도시의 모습도 변했으며 중국인의 생활방식 역시 마오 시대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러나 권력과 국가, 공산당과 지도자를 바라보는 정치적 구조에는 여전히 마오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실패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그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그를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 마오 개인뿐 아니라 중국공산당 혁명과 일당지배의 정당성까지 질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유령이 중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중국공산당이 아직도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마오쩌둥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여전히 ‘과거’가 아니다. 그는 오늘의 중국 정치 속에서 계속 살아 있는 현재형의 인물이다.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