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보아라. 나, 바로 내가 그다. 나 말고는 신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나는 상처 입히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한다.
내 손에서 빼낼 자 아무도 없다.” - 신명기 32,39
1966년 필립 리프는 『치료의 승리』(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에서 이렇게 썼다.
“종교적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고, 심리적 인간은 만족하기 위해 태어났다.”
어느 순간 우리는 하나의 문턱을 넘어섰다. 서구 문화의 전반적인 가치관은 우리의 죄에서 구원받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일보다, 자아실현과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치료의 언어가 모든 차원의 담론에 스며든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어떤 이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초기 심리학자들을 탓한다. 그들이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해로우며,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설득력 있는 지적 논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 (주로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그 유혹에 넘어가 그리스도교 교리를 심리학적 유행과 맞바꾸었고, 그 결과 밀려오는 심리학적 공론(空論)의 물결에 맞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소수의 충실한 신자들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이야기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지난 이천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진리들을 버리고, 공교롭게도 현대의 시대정신과 일치하는 더 깊은 진리를 발굴하겠다는 희망을 품는 교회에는 결코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우리가 프로이트가 만드는 데 일조한 세계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리고 그의 통찰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채 인간 심리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현대 심리학 이론과 연구를 통해 전해진 수많은 개념을 이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치료 문화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이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교가 치료 문화와 얽히게 된 것은 치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열정,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전인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교회의 일관된 강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에게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therapeuete)라고 명하셨으며,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세속적인 치유 방법을 하느님께서 신자의 영혼 안에서 이루시는 강력한 역사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였다.
과학 이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체액설과 같은 것을 포함하여, 당시 정신 건강을 설명하던 이론들을 대체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우리가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참으로 번영하고 온전히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물어보라.
현대 심리학은 단지 인간의 이러한 번영을 추구하는 탐구를 좁혀 놓았을 뿐이다.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만으로도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통찰은 우리의 내면생활에 관한 진실들을 밝혀냈다. 그것들은 열역학만큼 확고부동하지도 않았고 세균설만큼 실용적으로 유용하지도 않았지만, 심리학이 다른 학문들과 나란히 자신을 하나의 과학으로 여길 만큼 충분한 엄밀성을 갖춘 방식으로 도출되었다.
심리학은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를테면 도덕적 의무란 기껏해야 유용한 사회적 도구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가 본래 되어야 할 존재가 되는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거듭해서 되풀이했고, 마침내 그것들은 우리 문화의 중심적인 신화가 되었다.
칼 트루먼은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에서 이러한 문화적 신화가 가져온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족과 의미, 곧 진정성은 이제 내면으로 돌아섬으로써 발견되며, 문화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재구성된다. 실제로 문화는 이제 나의 심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나는 사회의 본성에 맞추어 나의 심리적 필요를 조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안을 일으키고 나를 진정하지 못한 존재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심리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부상한 이래, 심리학 연구와 이론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논의가 부족했던 적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문화적 거대 흐름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고, 부지런히 수용하기도 했으며, 혹은 타협점을 찾기 위해 투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격렬한 반치료적 메시지조차도 로르샤흐 검사 잉크 얼룩의 다른 절반과 같았다. 곧 지배적인 메시지에 대한 반대 속에서 그 정체성이 규정되었던 것이다. 치료 문화에 대한 저항이 헛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동화는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치료 문화가 교회에 제기하는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우리의 교리를 송두리째 내다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치료 문화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만 우리의 교리를 규정하게 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아갈 최선의 길은 우리 문화의 신화 제작자들이 제시하는 이야기보다 더 참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 안에서 죄는 단순히 우리의 “깨어짐”이나 “엉망인 상태”가 아니다. 죄란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쳐 주신 법을 어김으로써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피할 수 없는 성향이다.
우리의 구원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서도, 도덕적 규율을 거부함으로써도, 꾸밈없는 금욕주의를 통해서도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을 신뢰하는 데서 온다.
우리는 진단을 통해 자신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희생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으로 변화되어 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만족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치료 문화는, 죄가 참으로 자신들이 치유받은 치명적인 질병이며 지옥이 참으로 자신들이 구원받은 실재하는 곳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몸과 비교될 때 결국 흔들리고 말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