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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493] 사형은 왜 교황의 권위에 민감한 문제인가

2026-10-16 07:55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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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쇼 Joseph Shaw is a recovering academic, a public philosopher, and a freelance writer. 공공철학자, 자유기고가


레오 14세 교황은 10월 10일 세계 사형 반대의 날을 맞아 X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올렸다.

"사형은 인간의 불가침성과 존엄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사형에 의지하지 않고도 공동선을 수호하고 정의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을 보호하면서도 죄를 지은 이들에게 속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하지 않는 효과적인 구금 제도가 발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서구 엘리트 가운데 가장 완고한 반동주의자들과 일부 포퓰리스트를 제외하면, 이 발언은 지극히 당연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당연한 말이 아니며,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X 게시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8년에 개정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표현을 빌려 온 것이다. 이 개정문은 또한 “오랫동안 정당한 권위가 공정한 재판을 거쳐 사형에 의지하는 것은 특정 범죄의 중대성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응이며, 극단적인 수단이기는 하지만 공동선을 수호하는 용인 가능한 수단으로 여겨졌다.”라고 언급한다. 문제는 성경 전반에서,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에게서, 그리고 비오 12세 교황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에 관하여 발언한 모든 교황에게서 사형이 이와 같이 ‘여겨졌다’는 데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형에 대한 새로운 입장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마련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1995년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에 호소하면서 이렇게 썼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는 범죄자에게서 교화의 기회를 결정적으로 박탈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범죄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단이 있다.”

사형수에게는 ‘교화의 기회’가 없다는 기이한 주장은 제쳐 두더라도, 그보다 몇 년 앞서 당시 새로 나온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은 더욱 신중했다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유혈을 수반하지 않는 수단으로도 공격자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지키고 공공질서와 사람들의 안전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다면, 공권력은 그러한 수단에 한정해야 한다. 그러한 수단이 공동선의 구체적인 조건에 더 잘 부합하며 인간의 존엄성에도 더욱 합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놀라운 대목이다. 그에 앞서 형벌의 ‘치유적’ 효과와,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의 ‘속죄적’ 효과가 논의되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궁극적인 형벌인 죽음이 왜 범죄자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반면, 그보다 가벼운 형벌은 그 존엄성을 확인해 주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입장은 신중한 실천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표현했지만, 분명 사회와 제도의 현실에 관하여 하나의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세 영역의 이처럼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사실들을 평가할 때, 교황은 무류성의 은사를 행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은 부유한 국가들 밖에서는 범죄자를 수감하는 것만으로 그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엘 차포’로 알려진 악명 높은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은 2001년 멕시코의 교도소에서 탈옥했고, 2015년에 다시 탈옥했다. 탈옥하기 전에도 그는 다른 많은 범죄자들처럼 감옥 안에서 마약 밀수를 조율하고 적대자들의 암살을 지시하는 등 자신의 활동을 계속했다. 어쨌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을 일반화하고 있었던 것이지,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천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과 이제 레오 교황의 발언은 다음 세 가지 혼동 위에 세워져 있다. 첫째, 현대의 여건에서는 공공질서를 수호하는 데 사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둘째, 사형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난다는 것, 셋째, 사형은 범죄자가 회개할 가능성을 낮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정된 교리서 본문에서 이러한 주장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상황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인간의 불가침성과 존엄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사형이 단지 현대의 여건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그릇된 것이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논란이 큰 발언에 어느 정도 모호함을 남겨 두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징이었다. 그를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이, 라틴어로는 ‘non posse admitti’, 이탈리아어로는 ‘inammissibile’인 이 표현이, 실제로는 ‘현대의 여건에서 이상적이지 않다’는 뜻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무리한 해석이지만, “인간의 불가침성과 존엄성을 침해한다.”라는 말에는 그보다도 더 설득력 없는 해석이 필요하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형을 실제로 배제하는 일을 현대의 여건과 연결했던 교리서의 기존 문구에 만족했다면, 이를 바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일은 현대의 교도소에 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어쩌면 지나치게 성급했을 일반화를, 교회가 역사적으로 가르쳐 온 내용과 명백히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굳혀 놓은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찾기 위해 그리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2년에 이렇게 말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처형이 문제 되는 경우에도 국가는 그 개인의 생명권을 마음대로 처분하지 않는다. 이 경우, 그가 자신의 범죄로 이미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박탈했을 때, 그 범죄에 대한 속죄로서 그에게서 생명의 향유를 박탈하는 것은 공권력에 유보되어 있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사형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수감이 으레 거론되지만, 오늘날 종신형은 끔찍한 과밀 수용과 끊임없는 폭력, 성적 학대를 수십 년 동안 겪는 것을 뜻한다. 2024년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도 종신형을 “숨겨진 사형”이라고 부르며 중요한 점을 짚었다. 성공회 신학자 올리버 오도너번이 주장했듯이, 모든 형벌은 범죄자의 삶에서 무언가를 빼앗으며, 그 삶 전체를 빼앗을 국가의 권리를 함축한다.

사실 오도너번은 전혀 다른 이유, 곧 사법제도가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실제 사형 집행에 반대했다. 그러한 종류의 반대는 언제나 가톨릭 신자들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새로운 것은, 그리고 이제 레오 교황이 되풀이한 것은, 사형 그 자체가 그릇되다는 주장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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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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