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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프랑스에서 들려오는 방화와 약탈 소식은 참담하다. 불만을 표출할 자유가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생계를 꾸려온 상인의 가게를 부수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며, 공공시설을 불태우는 행위는 어떤 구호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가난과 소외를 말하면서 또 다른 약자의 삶을 짓밟는다면, 그 주장은 스스로 정당성을 허무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의 대상을 정확히 해야 한다. 범죄자의 종교를 이유로 그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무슬림 가운데에도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폭력적인 극단주의의 위협에 시달리는 무슬림들 역시 우리가 연대해야 할 이웃이다. 책임은 신앙의 이름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와 그 행위를 지시하고 선동한 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고 종교라는 이유로 비판을 멈춰서도 안 된다. 신앙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권리다.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여성을 억압하고, 개종과 비판을 폭력으로 처벌하는 행태까지 보호하는 면허가 아니다.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사람을 짓밟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권위를 빌린 지배다.
우리가 맞서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거짓이다. 자비를 말하면서 증오를 가르치고, 구원을 약속하면서 복종을 강요하며, 정의를 외치면서 살인과 테러를 합리화하는 거짓이다. 종교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외면한다면, 가장 먼저 버림받는 사람은 그 폭력에 저항하는 선량한 신자들이다.
북한과 이란을 보라. 두 체제의 역사와 성격은 다르지만, 권력이 절대적 권위를 내세워 개인의 양심과 자유를 억누르는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북한에서는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이 인간의 존엄 위에 놓인다. 이란에서는 종교적 권위가 정치권력과 결합해 시민의 삶을 통제한다. 권력자가 스스로를 비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 때, 백성의 고통은 체제 유지를 위해 감수해야 할 비용으로 취급된다.
더욱 위험한 순간은 이러한 절대권력에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를 위한다’는 구호가 결합할 때다. 약자를 돕자는 뜻은 고귀하다. 그러나 그 뜻을 독점한 세력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곧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몰아붙이면, 선의의 언어는 억압의 도구가 된다. 인민을 위한다면서 인민의 입을 막고, 평등을 외치면서 특권을 세습하며, 해방을 약속하면서 탈출조차 금지하는 권력이 그 실체다.
신앙과 사상의 진정성은 구호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힘없는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반대할 자유를 허용하는지, 권력자의 잘못에도 책임을 묻는지로 드러난다. 사람을 살리고 양심을 일깨우는 믿음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도 성스러운 명분을 내세우는 권력에는 단호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선의가 있다고 악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선량한 시민과 신자들이 두려움 속에 침묵하도록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 국가는 폭력과 약탈을 법으로 제어하고, 종교 공동체는 신앙을 악용하는 선동을 거부하며, 시민사회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한다.
신앙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방패가 될 수 없다. 약자를 위한다는 구호도 범죄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거룩함을 자처하는 권력의 체면이 아니라, 그 권력 아래서 신음하는 한 사람의 생명과 자유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