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은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혼인 서약을 주고받는 행복한 신랑 신부의 마음속에서 그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단체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신부와 신랑 중 누가 먼저 죽을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런 생각은 그토록 아름다운 순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삶이 펼쳐진다. 약 40년 동안 이어진 나의 혼인은 지난달 죽음으로 끝났다. 내 삶의 빛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고, 거의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였으며, 여덟 자녀의 어머니였던 아내는 5년에 걸친 영웅적인 암 투병 끝에 마침내 예순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님 안에서 평안히 쉬소서.
치유는 결국 찾아올 것이다. 나는 이를 굳게 확신한다. 우리의 신앙은 또한 복된 재회를 말한다. 그것은 끝을 모르는 재회일 것이다. 다만 내가 남은 날들을, 회개하는 나의 영혼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나의 헌신과 믿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 참혹한 이별이 시간 속의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그 극심한 고통을 줄여 주지는 않는다. 내 정신은 부활의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내 마음은 그녀를 잃은 슬픔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그녀의 침묵의 소리는 귀가 멀 듯 크고, 그녀의 부재는 어디에나 현존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꾸짖는다. 이것이 뜻밖의 일인가? 나는 무슨 근거로 다른 결말을 기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 가능성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뿐인가. 내가 너무 근시안적이어서, 이 길 위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신앙 안에서 나보다 앞선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배우자를 잃고 슬퍼하는 과부와 홀아비들의 이 모임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는 내가 아내를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방식으로 배우자를 잃었다. 또한 처음에 나에게 캐럴라인을 충실한 신부로 주신 선하신 주님께서, 이 특별한 십자가 아래에서 나와 함께 서 있도록 친구들과 가족도 주셨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고통의 성모께서 서 계셨다, Stabat Mater dolorosa(라틴 성가) 나는 이 구절을 수백 번 들었다. 그러나 그 울림이 이토록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영원 전체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죽음과 악이 마치 승리한 듯 보이던 그 순간에,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신성한 아드님 곁에 서 계셨다.
모든 사랑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신다는 확신 안에서 말이다. 나의 하느님, 성모님께서는 얼마나 큰 믿음을 지니셨던가. 이제 성모님께서 나의 어머니가 되어 주시기를.
시편 안에서 우리는 찬미와 기쁨의 찬가를 바치는 동시에, 고통과 슬픔의 부르짖음도 올린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자 자녀인 우리의 신분은 어떤 식으로든 이를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몸이 여전히 그분 수난의 상처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영원 안에서 울려 퍼진다. 내 아내가 병의 십자가를 짊어졌듯이, 나 또한 이 이별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그러한 시련이 만들어 낸 상처를 지닌 채 영원으로 들어간다. 오직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고통들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 더 가까이 부르고 계신다. 이는 위로가 되는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내가 정말 그분께 그토록 가까이 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진정 그것을 원하는가? 그러나 내가 그 밖의 다른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오 나의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나의 약함 가운데 저를 도와주소서.
성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권고다. 특히 불안하거나 슬퍼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렇다. 주님께서 그녀를 당신께로 다시 부르셨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주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녀를 내게 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신데 말이다. 게다가 웃음과 삶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수많은 세월, 그리고 많은 어려움까지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더 강해졌고, 그분께 더 가까워졌다.
만일 5년 전 누군가 내게 다가와, 내가 짧은 기간의 극심한 고통만 견디면 아내의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다면, 나는 그 기회를 즉시 붙잡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남편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에 뛰어드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주님께서 그 짐을 지도록 나를 도와주시리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분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전혀 모르는 낯선 이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물며 나에게 해를 입히려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하신 일이다.
나는 미사에 참례하거나 성체조배를 할 때마다 나의 신부와 특별히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이 위로는 계속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느 순간 부드럽게 거두어져, 내가 어둠 속에서 붙들고 버티며 더욱 깊은 신뢰로 나아가도록 이끌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내 아내이자 친구였던 그녀를 닮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내게 보여 주었다.
그 길을 무너뜨리는 한 가지 방식은 이 땅의 것들, 심지어 가장 아름다운 것들까지도 절대화하여, 복되신 삼위일체와 더 깊은 친교로 초대하시는 부르심을 놓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국편』 전체로 인도한 뒤, 마지막으로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나서, 자신의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우리 모두가 부름받은 지복직관을 향해 돌린 데에는 참으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한 샘으로 돌아섰다. 우리 모두가 그 천상 잔치에 함께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오직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신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