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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올해는 마오쩌둥이 중국 전역을 광기의 정치운동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이른바 ‘5·16 통지’는 문화대혁명의 공식적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문건은 당내에 숨어 있다는 ‘부르주아 대표 인물’을 경계하고, 계급투쟁을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 1966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모든 잡귀사신을 쓸어버리자”는 사설을 발표했고, 그 뒤 베이징의 대학과 중학교를 중심으로 대중조직과 홍위병 운동이 급속히 확산됐다.
문화대혁명은 흔히 1966년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 사건처럼 설명된다. 그러나 당시를 경험한 증언자들과 연구자들의 설명은 다르다. 그것은 한순간의 폭발이라기보다 1949년 공산당 집권 이후 누적돼 온 정치운동의 총합이었고,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과 대기근, 사청운동을 거치며 축적된 국가폭력의 마지막 단계였다.
중국 독립 작가 왕지는 문화대혁명을 “1949년 정치노선의 연속”으로 본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5·16 통지는 단순한 문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돼 온 계급투쟁 논리를 다시 무기화한 정치 명령이었다. 문화대혁명은 기존의 억압 구조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실제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반혁명 세력 척결’이라는 구호는 1966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이미 그 이전부터 사회 구성원을 정치적 신분에 따라 구분하고, ‘적색’과 ‘흑색’, ‘혁명’과 ‘반혁명’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낙인찍어 왔다. 문화대혁명은 이러한 정치적 낙인을 학교, 직장, 가정, 거리로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문화대혁명 직전 중국 사회를 뒤흔든 또 하나의 배경은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진행된 ‘사청운동’이었다. 사청운동은 정치, 경제, 조직, 사상을 ‘청산’한다는 명목 아래 농촌과 기층 조직을 감시하고 재편하는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문제 인물’로 분류되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이들은 다시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 초기의 폭력은 무차별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정치적으로 선별적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교장이, 지방에서는 지식인과 간부, 과거 정치운동에서 이미 낙인찍힌 사람들이 먼저 공격받았다. ‘제1세대 홍위병’의 상당수는 혁명 간부의 자녀, 이른바 ‘홍이대’였다. 이들은 마오의 이름을 앞세워 기존의 정치적 낙인을 폭력적으로 집행했다.
당시 많은 교사와 지식인들은 공개비판, 모욕, 폭행, 감금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단지 권력투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고, 교육과 학문, 문화와 전통을 ‘계급의 이름’으로 짓밟은 반문명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내부에도 단계적 변화가 있었다. 1966년 8월 마오쩌둥이 발표한 《포격사령부 — 나의 대자보》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마오는 기존의 당·정 관료조직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렸다. 그가 말한 표적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집권파”였다.
이후 등장한 것이 이른바 ‘제2세대 홍위병’ 또는 반란파였다. 이들 가운데는 건국 이후 반복된 정치운동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아온 청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오의 선동을 자신들의 분노를 분출할 기회로 받아들였다. 기존 권력기관과 간부를 공격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더 이상 중앙의 정치문건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 내전 양상으로 번졌다.
각 지역에서는 ‘반란파’와 기존 권력질서를 지키려는 ‘보황파’가 충돌했다. 이념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지역 권력, 조직 이해, 개인적 원한, 생존 본능이 뒤엉켰다. 1967년부터 1968년 사이 우한, 충칭, 광시 등지에서는 무장투쟁과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총기 탈취와 사실상의 군사 충돌까지 일어났다.
문화대혁명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중은 자신들이 거대한 권력투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마오를 절대화한 정치문화 속에서, 맞고 끌려가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조차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쳐야 했다. 권력의 핵심에서 벌어지는 궁정투쟁은 민간이 알 수 없었고, 민간에게 허용된 것은 오직 충성 경쟁과 상호 고발뿐이었다.
문화대혁명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벌인 정치적 동원 실험이었다. 법은 사라졌고, 절차는 짓밟혔으며, 인간관계는 감시와 고발의 체계로 바뀌었다. 학생은 스승을 때렸고, 자식은 부모를 고발했으며, 이웃은 이웃을 ‘계급의 적’으로 몰았다.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었다. 국가가 이념을 절대화하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며, 법보다 정치노선을 앞세울 때 사회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단계적 정치 재앙이었다. <계속>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