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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5·18을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처음에는 정치권의 과잉 해석과 호들갑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타벅스 논란을 넘어 고교야구 응원 현장에까지 번져 나가고 있다. 학생들의 밈 하나에 정치권이 달려들고, 교육 현장까지 징계의 칼을 들이대는 모습은 정상적인 자유민주 사회의 풍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도대체 5·18이 무엇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대한민국 국민은 묻기 시작했다. 왜 5·18은 질문조차 조심해야 하는 성역이 되었는가. 왜 5·18 유공자 문제를 두고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면 곧바로 낙인과 공격이 뒤따르는가. 왜 유공자 명단 문제는 오랫동안 국민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음에도 정치권은 정면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불온시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공적 예우와 국가적 보상이 따르는 사안이라면 국민 앞에 책임있는 설명이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관련 세력은 설명보다 봉쇄를 택해 왔다. 설득보다 겁박을 앞세웠다. 의문을 풀기보다 의문을 제기한 사람을 공격했다. 이것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5·18 정신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권의 개입이다. 애당초 역사적 비극은 차분히 기리고, 제도적 문제는 투명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치는 5·18을 끊임없이 정쟁의 무기로 활용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들고, 반대편을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으며, 특정 진영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상징처럼 성역화했다. 그 결과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5·18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피로감과 조롱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학생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왜 그런 밈을 만들고, 왜 그런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부터 봐야 한다. 금기와 성역은 존중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반감과 냉소를 키운다. 질문을 막으면 의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커질 뿐이다. ‘말하지 말라’, ‘묻지 말라’, ‘건드리지 말라’는 식의 태도야말로 오늘의 사태를 키운 근본 원인이다.
유공자 명단 문제도 마찬가지다. 법적·개인정보적 제한이 있다면 그 이유를 국민에게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공개 범위에 한계가 있다면 어떤 기준과 절차로 심사되었는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제도적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믿으라”고만 한다면 신뢰가 생길 리 없다. 떳떳하다면 설명하라. 설명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의문을 탓하지 말라.
지금 필요한 것은 징계와 입틀막이 아니다. 반성과 투명성이다. 5·18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 이름을 정치적 방패막이로 쓰는 일을 멈춰야 한다. 학생들의 표현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역사적 명예를 지킬 수 없다. 오히려 5·18을 더 큰 논란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과유불급이다. 지나치면 넘치고, 넘치면 무너진다. 5·18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질문을 봉쇄하고, 비판을 처벌하고, 젊은 세대의 반응을 힘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5·18 자체에 돌아간다. 이번 사태는 5·18 관련 세력들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성역화와 정치적 독점, 불투명성과 과잉 대응이 누적된 결과다.
이제라도 5·18 관련 세력과 정치권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역사는 권력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신뢰로 지키는 것이다. 국민의 질문을 두려워하는 역사, 학생들의 밈 하나에 흔들리는 역사, 명단 논란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역사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5·18을 더 이상 정쟁의 무기와 금기의 성역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떤 역사도 질문 위에 서야 하고, 어떤 공적 예우도 투명성 위에 서야 한다. 입틀막으로는 5·18 정신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진실과 설명, 절제와 책임만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