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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420] 가톨릭의 순간인가, 복음주의의 세기인가?

2026-08-04 07:43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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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먼 클라인 Timon Cline is an attorney and Director of Initiatives at the Hale Institute of New Saint Andrews College. 변호사


온라인에서 떠도는 이야기와는 달리, 우리는 지금 ‘가톨릭의 순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복음주의의 세기’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보다 가톨릭을 떠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주의 개신교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개종률과 신앙 유지율을 보이며, 교회 출석, 성경 읽기, 교리교육과 같은 실천적 신심에서도 더 건강한 수준을 드러낸다.

지난 반세기의 격변 속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은 수적으로나 영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고, 자신들의 제도를 거듭 개혁했으며, 지속적으로 다른 종파들보다 우수한 성과를 보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미국인의 비율은 4%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전체 미국인의 비율인 1.5%보다 높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가톨릭교회가 수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에도, 가톨릭이 공적 담론을 장악하고 있으며, 리처드 존 뉴하우스가 1987년 저서 『가톨릭의 순간: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교회가 지닌 역설』에서 예견했듯이 ‘종교적 통찰에 기반한 공공철학’을 통해 그 담론의 윤곽을 형성하고 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문화였던 미국이 그럼에도 가톨릭의 종교적 정서에 의해 이끌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한때 성공회 신자가 불과 수백만 명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이 나라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나름 합리적인 기대처럼 보인다.

이러한 ‘가톨릭의 순간’을 뒷받침하는 통상적인 증거로는 J. D. 밴스가 제시된다. 그의 개인적 존재와 공적 영역에서 가톨릭 신학 개념을 원용하는 태도 모두가 그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밴스는 한 번 이상 공개적으로 교황의 권한을 엄격히 영적 사안에만 한정하고, 자신의 신학적 판단을 내세운 바 있다. 이 모든 것은 기묘할 정도로 낯익게 들린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세속 군주들에게 독일의 주교좌와 재산, 법률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끊으라고 촉구했다. 부통령이 개신교주의의 혐의를 받지 않는다면, 적어도 ‘미국주의’의 혐의는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최초의 미국인 교황이 재위하는 때에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말한 ‘구속력 있는 호소’를 확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헌터가 말하는 ‘구속력 있는 호소’란 지배적인 문화 규범이 만들어 내는 ‘내적 명령’과 도덕적 표현을 뜻한다.

물론 자존심 있는 개신교 신자라면, 오늘날 널리 논의되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나 ‘정당한 전쟁’에 관한 담론을 가톨릭이 독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요한 칼뱅의 말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Augustinus totus noster est).

가톨릭이 지성계에서 실제 영향력 이상으로 두드러진 존재감을 보여 온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은 사회정치적 사안을 해석하기 위한 도덕적 틀과 어휘를 제공했으며, 수적으로 더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그 틀과 어휘를 아무런 이질감 없이 받아들였다. 조지프 보텀이 『불안의 시대: 탈개신교 윤리와 미국의 정신』에서 표현한 것처럼, 가톨릭의 공헌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에서 유래한 도덕적 진리를 세속적 공론장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준 데 있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오버거펠 대 호지스’ 판결은 목적론적 논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돕스 대 잭슨 여성보건기구’ 판결은 인간학이 아니라 미국의 전통과 헌법 구조가 지닌 무게에 의존했다.

보텀의 계산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지속된 이전의 ‘가톨릭의 순간’은 주류 개신교가 남긴 공백을 채우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탈개신교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은 “철학적으로 일관된 공적 어휘” 없이도 자신들의 상속권을 유지했다. 결국 “하나의 사상 체계로서 가톨릭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미국인 교황조차도 이러한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조슈아 미첼이 지적했듯이, 비록 변질되기는 했지만 공적 이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개신교의 신학적 범주들이다. 오직 개신교만이 방탕한 자녀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잘못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

우리의 정치가 신학적 색채를 띠는 한, 사회정치적 상상력을 형성하는 것은 폭넓고 초교파적인 복음주의이다. 지난해 찰리 커크의 추모식을 지켜본 거의 모든 관찰자는 그것을 복음주의 부흥집회에 비유했다. 트럼프주의 우파와 공명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유형이 있다면, 그것은 찰리 커크의 그리스도교이다.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초교파 복음주의 교회들이 미국 그리스도교의 어느 분야보다도 큰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밴스가 머지않아 미국의 세 번째 로마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재임 중 특정 교파를 떠나 초교파 소속을 택한 최초의 대통령인 트럼프의 정책적 유산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밴스의 새 책 표지는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의 영적 자서전을 팔기 위해, 영리한 출판사는 표지에 전형적인 시골 개신교 교회를 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밴스 자신도 인정했듯이, 그것은 그의 성장 배경 대부분을 반영하는 이미지이다.

미국의 미학과 정서는 여전히 변경 개신교에 매료되어 있다. ‘힐빌리 토미즘’은 친근하고 매력적인 브랜드이지만 책을 팔지도, 선거에서 승리하게 하지도 못한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단순한 첨탑을 지닌 회중교회 예배당이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미학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탈문해적 소셜미디어 시대가 가톨릭에 유리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밴스와 같은 유명 엘리트 개종자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가톨릭이 지닌 지성적 명성이다. 가톨릭이 바로 그 고도의 문해적 명성을 잃는다면, 엘리트층에 대한 매력도 잃게 될 것이다.

더 시급한 질문은 문해력의 쇠퇴가 개신교에 타격을 주어 가톨릭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을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개신교가 전파된 곳마다 문해력이 뒤따랐기 때문에, 그 반대도 성립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곧 문해력이 쇠퇴하면 개신교도 쇠퇴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해력이 개신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설교이다.

16세기에 개신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강단이었다. 강단은 여전히 개신교 건축과 영성의 중심이며, 설교는 그 지배적인 전달 매체이다. 역사상 가장 문해력이 높았던 사회 가운데 하나였을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도, 사람들의 시간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여전히 말로 선포되는 말씀이었다. 해리 스타우트에 따르면, 평균적인 뉴잉글랜드 교회 신자는 평생 1만 5천 시간의 설교를 들었다.

개신교의 흥망은 가톨릭 틱톡의 화려함이 아니라 강단의 힘에 달려 있다. 개신교 신자들이 염려해야 할 것은 Z세대 인플루언서를 육성하는 일이 아니라, 담대하고 유능한 목회자들로 강단을 채우는 일이다. 세 시간짜리 팟캐스트가 선거의 흐름을 바꾸는 시대라면, 개신교 설교자들도 조금 더 길게 계속 말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토크빌이 예견했던 로마를 향한 “위대하고도 급격한 전진”은 미국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상정한 작동 방식은 오늘날의 개종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무의식적인 동화를 통해 로마로 향하게 되리라고 보았다. 곧 가톨릭 신자들이 교리적으로는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평등, 자치, 시민적 개인주의라는 미국 민주주의의 습관을 조용히 흡수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 젊은 개종자들의 관심을 끈 로마 가톨릭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개종자들이 매력을 느낀 것은 울트라몬타니즘이 제시하는 통일된 교리와 권위의 체계였다. 정치적 가톨릭주의를 다시 논의의 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반발이었다.

미국에서 가톨릭이 승리하리라는 토크빌의 꿈은 미국적 삶의 방식, 다시 말해 개신교적 삶의 방식에 동화되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교리”와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의 결합이었다. 실제로 가톨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명백히 개신교적인 교파 경쟁 체제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톨릭의 순간’이 존재한다 해도, 아마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속력 있는 호소를 지배하려면 지성적 명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당 좌석을 채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미국에 가톨릭 신자와 유대교 신자가 언제나 존재하리라는 데 나는 기꺼이 내기를 걸 수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논리라면 미국은 언제까지나 개신교 국가로 남을 것이다. 미국은 언제나 개신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개신교적 성격을 상실하는 만큼, 미국은 더 이상 미국이 아니게 된다. 미래는 가톨릭의 것이 아니다. 미래는 개신교의 것이거나, 아니면 무신론의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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