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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잠실 올림픽공원이 어느새 자유를 외치는 청년들의 성지가 되었다. 무너져가는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국민의 참정권과 헌법적 권리를 지키겠다는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든 공간이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시민의 목소리를 향해 권력은 또다시 익숙한 단어들을 꺼내 들었다. “불법”, “패가망신”, “엄단”이라는 말이다.
참으로 가관이다. 불법과 반칙, 특권과 위선의 그림자를 스스로 지우지 못한 세력들이 이제는 청년 시민을 향해 불법을 운운하고 있다. 자신들이 권력의 이름으로 저질러 온 무리수와 국민 기만에는 침묵하면서, 국민이 광장에 서는 순간 법과 질서를 앞세운다. 이것이야말로 선택적 법치이며, 권력의 편의에 따라 헌법을 들었다 놓는 오만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른바 586 기득권 세력의 변질이다. 한때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살았던 이들이 이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집권하고, 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른 채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장본인으로 등장했다. 그들이 외쳤던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위한 가치였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위한 구호였는가. 오늘의 행태는 그 질문에 대한 냉혹한 답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광장을 찬양하던 이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광장은 불법으로 몰아간다. 과거에는 청년의 분노를 시대정신이라 부르던 이들이, 지금의 청년 분노는 선동과 소란으로 낙인찍는다. 과거에는 권력 감시를 시민의 의무라 말하던 이들이, 이제는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에게 “엄단”을 말한다. 이쯤 되면 민주팔이가 민주탄압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잠실 올림픽공원에 모인 청년들은 자유대한민국의 시민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특권도 보복도 아니다. 투명한 선거, 공정한 절차, 책임 있는 권력,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헌법의 원칙이다. 이 당연한 요구에 대해 권력이 “엄단”이라는 단어로 답한다면, 그것은 청년들을 겁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당성 빈곤을 고백하는 일이다.
법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공권력은 시민을 윽박지르는 도구가 아니라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장치여야 한다. 평화적 집회와 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권리다. 권력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패가망신”이라는 말 역시 섬뜩하다. 국민을 상대로 권력이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되기 어렵다. 이는 설득의 언어가 아니라 겁박의 언어다. 책임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보복정치의 언어다. 국민을 주권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청년들은 더 이상 낡은 구호와 위선적 선동에 속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이중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 자유를 억누르려는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자유의 외침을 불러올 뿐이다. “엄단”의 협박은 시민을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민낯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올림픽공원의 청년들은 이미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권력자가 허락할 때만 존재하는 장식품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두 발로 서서 지키는 현실이다. 광장의 촛불이든, 태극기든, 손팻말이든, 침묵하지 않는 시민의 양심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권력이 진정 법과 질서를 말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들에게 적용해야 한다. 국민을 향해 엄단을 외치기 전에, 권력 내부의 불법과 부정, 위선과 특권부터 엄단해야 한다. 청년을 겁박하기 전에,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책임지는 것이 순서다.
청년의 분노는 공포로 꺾이지 않는다. 국민의 권리는 협박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의 성지가 된 올림픽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분명하다.
엄단? 어디 해보라.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