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그리스도에 관해 충분히 오랫동안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체적인 후보를 지목하게 된다. 베네딕토는 자신이 의심하는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싶은 통속적인 유혹에 저항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몇 가지 단서를 남겼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그의 뒤를 이은 자유화 성향의 교황이다.
요아킴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덕망 높은 교황 다음에 교황직을 차지할 것이었다. 요아킴의 추종자들 가운데 일부는 베네딕토와 마찬가지로 여든다섯 살에 교황직에서 물러난 첼레스티노 5세를 그 선한 교황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의 후임자 보니파시오 8세가 적그리스도라는 결론이 나왔다.
베네딕토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2009년 첼레스티노의 무덤 위에 자신의 교황 팔리움을 올려놓았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는 티코니우스의 ‘이분된 교회’ 이론을 강의했다.
그렇다면 베네딕토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던 것인가? 이 이론은 매혹적이지만, 베네딕토가 의심했던 인물은 따로 있었다.
솔로비요프의 적그리스도는 니체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베네딕토가 에라스무스 강연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 명예학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추종자들을 유혹한다.
이 마지막 세부 묘사는 베네딕토에게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는 2007년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도 이 사실을 다시 지적했다. 아마도 자신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튀빙겐대학교에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춘다면 베네딕토의 더욱 미묘한 의도를 놓치게 된다.
한스 큉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제였으며 튀빙겐에서 라칭거의 동료였다. 큉은 1960년부터 1996년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큉은 서른네 살의 나이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최연소 전문위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공의회는 그가 제시한 많은 권고를 받아들였다.
바티칸 전문가 피터 헤블스웨이트는 이렇게 평가했다.
“한 신학자가 그토록 큰 영향력을 갖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큉은 훗날 안락사를 옹호했고, 교황 무류성을 부정했으며,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토니 블레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그를 지도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톨릭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큉이 교회에 미친 영향력은 보통의 교황보다도 컸다. 큉이 제시한 범종교적 ‘세계윤리’는 19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의 의제를 설정했다.
솔로비요프의 적그리스도 이야기를 강의했으며 베네딕토의 가까운 친구였던 가톨릭 철학자 로베르트 슈페만은 1996년 「기획으로서의 세계윤리」라는 글을 통해 세계윤리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슈페만은 이렇게 썼다.
“모든 것 위에 떠돌고 있던 것은 한 튀빙겐 신학 교수의 이름이었다.”
“평화와 안전”(1테살 5,3)을 구호로 삼는 적그리스도처럼, 큉의 세계윤리도 세계 평화를 목표로 삼았다.
“종교들 사이에 평화가 없으면 민족들 사이에도 평화가 없다.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없으면 종교들 사이에도 평화가 없다.”
평화에 대한 집착은 솔로비요프의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와 구별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적그리스도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칼을 가져왔다. 나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선과 악이라는 관념으로 인류를 분열시켰으며”, “심판의 날을 내세워 세상을 위협했다”고 비난한다.
슈페만이 지적하듯, “큉의 순화된 그리스도교” 역시 마지막 때에 관한 모든 생각을 억누른다.
슈페만은 이렇게 썼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 청중에게서 마음 놓였다는 듯한 미소가 나오기를 기대하신 것은 분명 아니다.”
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그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경고도 제거한다.
“그 날들을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큉은 우리에게 적그리스도와 대환난을 잊으라고 요구한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 세상뿐이며,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세계윤리 없이는 생존도 없다.’
솔로비요프의 적그리스도는 『보편적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열린 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사람들을 포섭한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은 저서였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했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고대의 전통과 상징을 향한 고귀한 존중을 사회·정치 문제에서의 광범위하고 대담한 급진주의와 결합했다. 무한한 사상의 자유를 모든 신비로운 것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과 결합했다. 절대적 개인주의는 공동선을 향한 열렬한 열정과 나란히 자리했고, 지도 원칙에서의 가장 고상한 이상주의는 생활의 필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완벽하게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매끄럽게 결합되었다.”
슈페만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언어로 큉의 세계윤리를 묘사한다.
“그는 모든 반론을 미리 숙고했다. 그가 제시하는 길은 ‘합리적인 중도’이다. 곧 ‘방종주의와 율법주의 사이’, ‘소유욕과 소유에 대한 경멸 사이’,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사이’, ‘감각적 쾌락과 감각에 대한 적대감 사이’ … ‘세속주의와 현세 부정 사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중도는 끝없이 이어진다.
라칭거는 이 논증들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여겼다. 그는 2004년 위르겐 하버마스와 토론하면서 큉을 직접 반박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슈페만의 논문을 읽어보라고 안내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960년대 튀빙겐에서 시작된 베네딕토의 조용한 대큉 투쟁은 적어도 1260년대 이래 계속되어 온 전쟁의 가장 최근 전선이었다.
이 전쟁터에는 한때 솔로비요프와 니체가 서 있었고, 그들보다 앞서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서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운명에 관한 문제를 놓고 논쟁했다.
적그리스도가 큉과 같은 동료 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라칭거와 슈페만에게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 이 세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적그리스도가 어느 대학 연구실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이 세 사람처럼 섬세하고 강력하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설령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사상이 언제나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가정한 것은 베네딕토의 ‘거장다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실수였다.
마지막 몇 년 동안 이전보다 덜 자제했던 베네딕토는 어쩌면 자신의 권위와 위대함이 토대를 두었던 학문적 논쟁들로부터 세상이 이미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감벤과 같은 ‘침묵의 세대’ 사상가만이 그를 이해하는 데 가까이 다가왔을 뿐이며, 대학은 오래전에 슈페만과 같은 협력자도, 큉과 같은 적대자도 더 이상 배출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모두 잃어버렸다.
학자 베네딕토가 자신의 세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베네딕토에게 그것은 커다란 오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들을 뒤따른 철학자들은 영원한 문제들을 행간에 숨겨 기록했다. 그들은 당대의 뛰어난 사람들만을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사유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들은 세계의 영원성을 확신했다. 미래에도 철학자에게 고유한 해석 작업, 곧 매우 길고 결코 쉽지 않지만 언제나 즐거운 작업에 몰두할 지성과 시간을 갖춘 새로운 학생들이 등장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에는 시작이 있으며 끝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묵시가 찾아온다. 모든 비밀이 드러나는 계시이며 모든 해석이 끝나는 순간이다.
비밀주의에도 때와 장소가 있다. 비밀주의의 반대말은 계시다. 그러나 세상의 운명과 우리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서는 비밀적 침묵이 허용될 수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밤이 깊어졌을 때, 그 누가 철학적 함구 속에서 구원을 바랄 수 있겠는가? <끝>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