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단순하면서도 성경적인 진리가 하나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똑똑하지 않으며,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만큼 지혜롭지도 않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최근 한 친구가 라이언 버지가 X에 올린 도표를 공유해 주었을 때 나는 이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버지는 흥미로운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다. 그는 유능한 정치학자이자 통계학자이며, 전직 침례교 목사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가톨릭 사제들과 주류 개신교 목회자들 가운데 자신의 사목과 목회에 진정으로 선교적인 접근을 취하는 이들은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는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복음주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다른 이들의 회심을 매우 중요한 우선순위로 여기는 이들이 훨씬 많다.
이 자료는 적어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한번 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선교 정신이 매우 강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평생을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들 곁에서 살아왔다. 나의 어머니 클레어에게는 무척 사랑하던 사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메리놀회 선교사제로서 칠레의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복음을 선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우리 가족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 모든 여윳돈을 인도의 가톨릭 선교지에 보냈다. 식사 때마다 나는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 사진을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 사진에는 깡마른 몸으로 환하게 웃는 한 가톨릭 선교사가 수많은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클레어는 입을 열어 가르치기 전부터 이미 훌륭한 교리교사였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DNA 속에 영혼 구원을 향한 열망을 깊이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열매를 맺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가나와 기니비사우, 세네갈의 가톨릭 선교지들을 두루 다녔다. 그곳에서는 탁월한 사도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일에 참여하는 사제들과 여성 수도자들, 평신도 선교사들은 자신의 온 생애를 걸고 아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선교 활동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 복음화 활동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방대하다. 그렇다고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수행하는 풍성한 복음화 활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감동적인 개인적 체험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이런 경험이 결코 특별하거나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에는 분명한 질문이 제기된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13%가 ‘전(前) 가톨릭 신자’인가? 달리 말하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한 사람들 가운데 왜 43%가 더 이상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여기지 않는가?
그리고 버지의 자료가 정확하다면, 왜 가톨릭 사제 가운데 겨우 32%, 그리고 주류 개신교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똑같이 초라한 32%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믿는 특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로 회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82%에 이른다.
버지의 자료에서 조사 대상이 된 사제들의 연령 분포를 알 수 있다면 유용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미국 가톨릭교회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언제나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공의회 이후 평신도들의 신앙적 확신은 흔들렸고 미국 신학교들의 건전성 역시 타격을 입었다. 이는 이후 발생한 성직자 성학대 위기와, 신앙과 전례 문제에서 너무도 자주 나타났던 혼란을 통해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개혁은 더욱 건전하고 교리적으로 충실한 신학교 양성 과정을 만들어냈으며, 그 성과는 많은 젊은 성직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버지의 조사 결과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퓨리의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종교 안에서 성장했거나 종교 없이 성장한 뒤 가톨릭 신자가 된 미국 성인 한 명이 있는 반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성장했지만 이제는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부르지 않는 성인은 8.4명에 이른다.”
‘다음 시대의 미국’, 곧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새로운 미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처하게 될 현실은 이미 16년 전 이 지면에서 상당히 정확하게 예견된 바 있다. 당시 찰스 채퓻은 미국이라는 실험의 식민지 시대 뿌리가 철저히 개신교적이었으며, ‘교황주의(popery)’와 가톨릭적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경멸의 흐름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18세기와 19세기 내내 가혹한 개신교계의 차별이 이어졌다. 때로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수녀원과 성당, 신학교에 물리적 공격이 가해지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역사 때문에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그토록 해방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미국의 주류 개신교가 1960년에 이르렀을 때 이미 자신의 도덕적·지적 역량을 상당 부분 소진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세속화 세력은 이미 문화적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주류 개신교를 무너뜨려 놓았다. 실제로 수십 년에 걸친 투쟁 끝에 가톨릭 신자들이 마침내 미국 사회라는 무대의 중심에 올라섰을 때, 극장의 경영권은 이미 다른 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새 주인들은 옛 주인들보다 가톨릭에 훨씬 덜 우호적이었고,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목표를 이루는 데 훨씬 더 영리하고 야심찼다.
간단히 말하면, 이 나라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언제나 우리가 이 사회에 속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힘겨운 과제를 안고 살아왔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언젠가 지적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CIA와 FBI, 해병대에서 그토록 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찾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는 것은 늘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것은 선의에서 출발한, 사회에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사는, 맹렬히 물질주의적이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이제는 급속히 해어져 가는 막연한 종교적 외피만을 두른 문화 속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미국인’이 되는 일에는 탁월하게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를 분명하게 ‘가톨릭계 미국인’으로 만들어 주던 것은 너무도 자주, 너무도 많은 이들에게서 씻겨 나가 버렸다. 우리는 세상 속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 소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버지의 조사 결과가 보여주듯이, 우리의 사제들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늘날 가톨릭교회 안에는 수많은 활기찬 사도직 단체와 활동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훌륭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온 거대한 조류를 거슬러 일하고 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에 동화되고 ‘잘 어울려 살아가려는’ 가톨릭의 본능은 결국 막다른 길로 향하는 잘못이다. 미국 복음주의 신자들의 10%는 과거 가톨릭 신자였다.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로 개종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활력과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서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 그런가? 개종자들이 복음주의에 끌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확신과 그 말씀을 전하려는 열정 때문이다. 복음주의에는 많은 약점이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다른 칼럼 한 편을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약점들이 복음주의가 지닌 단순한 호소력의 핵심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필요성, 그리고 세상 안에서 능동적으로 제자직을 살아가야 한다는 요청이다.
미국에서 전반적으로 종교 실천이 쇠퇴하는 현상에는 복잡한 원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 지도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가려버리는 온건한 무신론과 소비 중독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를 만들어 내는 데 우리 자신도 공모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로 받은 자신의 정체성과 선교적 의무를 잊어버리는 만큼, 우리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로 신자들의 유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다. 적어도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우정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증거하는 삶은 충실한 가톨릭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이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