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또 하나의 장면을 연출했다. 김정은이 딸과 함께 평양 화성지구의 상업시설을 시찰하며 강아지를 안고 웃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이 대대적으로 공개됐다.
반려동물 상점, 미용시설, 놀이공간, 악기점, 대형 미용실까지 등장한 화면은 북한 당국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분명히 담고 있다. 북한은 이제 생존만을 걱정하는 사회가 아니라 생활문화와 여가를 누리는 “문명한 국가”라는 선전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세상에 던지는 진실은 정반대다. 지도자는 애완견을 품에 안고 웃고 있지만, 주민 다수는 지금도 하루 끼니를 걱정한다. 평양의 특권 공간에서 연출된 화려한 소비 풍경은 북한 주민 전체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다수 주민이 그 풍경 밖으로 밀려나 있음을 더 선명히 드러낸다. 정권이 문명과 풍요를 자랑하려 할수록, 주민의 굶주림과 박탈은 더욱 적나라해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체제의 잔인한 괴리감이다. 주민에게 절박한 것은 반려동물 미용도, 애완용품도, 세련된 쇼핑 공간도 아니다. 오늘 저녁 가족이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내일 장마당 가격이 얼마나 더 오를지, 옥수수 한 되라도 구할 수 있을지 여부가 삶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정권은 주민의 생존 문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런 장면은 “인민을 위한 나라”의 증거가 아니라, 인민의 고통을 보지 않으려는 권력의 무감각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금 북한 주민의 삶은 단순한 불편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 기반 붕괴의 수준으로 내몰리고 있다. 식량난은 양의 부족만이 아니라 질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육류와 지방질, 단백질 섭취는 일부 계층에게 사치가 되었고, 장마당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와 양도 지역과 소득에 따라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한때 식용으로 쓰이던 단고기조차 쉽게 구하기 어렵다는 증언은 주민의 선택 가능한 먹거리 자체가 얼마나 축소되었는지를 웅변한다. 이는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다. 배급체계의 무력화, 구매력의 악화, 지역 간 격차의 심화, 유통 위축이 겹쳐 만들어 낸 구조적 붕괴다.
이런 현실에서 반려동물 상점의 세련된 내부와 미용시설, 놀이공간을 자랑하는 것은 단지 부적절한 선전이 아니다. 그것은 위선이다. 애완동물 문화는 인간의 생존이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소비 영역이다. 사람이 먼저 먹고, 입고, 치료받고,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그 다음에 동물을 돌보고 꾸미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
북한은 정반대다. 기본적인 인간 생활의 토대조차 무너져 있는 곳이 적지 않은데, 정권은 그 위에 애완동물 문화를 얹어 체제의 “발전”을 주장한다. 이는 풍요의 징표가 아니라 도덕적 파산의 징후다.
북한은 늘 ‘인민대중제일주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화면 속에서 정작 인민은 보이지 않는다. 특권 공간과 지도자 가족의 연출만 있을 뿐이다. 주민의 식탁은 비어 있는데, 애완동물의 목욕과 미용이 가능한 사회라고 자랑하는 체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체제인가.
답은 이미 분명하다. 북한 체제는 주민 전체의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 가문의 안정된 지속과 권력의 상징 조작을 위해 작동한다. 굶주림을 해결하는 대신 굶주림을 가리는 화면을 만들고, 민생을 돌보는 대신 민생 위에 선전의 조명을 비춘다.
주민이 먹지 못하는 사회에서 지도자가 애완견을 안고 웃는 장면은 결코 정상 사회의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체제의 여유가 아니라 체제의 무감각이며, 발전의 증거가 아니라 왜곡의 증거다.
북한의 본질은 이번에도 변하지 않았다. 주민의 삶보다 권력의 연출이 먼저이고, 현실의 해결보다 이미지의 포장이 우선이다. 화려한 상점 내부와 다정한 가족 연출은 잠시 눈을 끌 수는 있어도, 주민의 빈 식탁을 지울 수는 없다.
먹을 것이 없는 사회에서 애완동물의 소비문화를 자랑하는 체제, 바로 그것이 북한의 민낯이다. 김정은이 애완견을 안고 웃는 순간, 북한 주민의 굶주림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실로 되돌아온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