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명: 뉴스홈 > 오피니언 > 종교 기사 제목:

[USA 가톨릭 329] 등반과 죽음

2026-05-05 08:01 | 입력 : 리베르타임즈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R. R. 리노 R. R. Reno is editor of First Things. 편집장


지난 1년 남짓 동안 나는 회고록을 써 왔다. 주제는 젊은 시절 암벽등반의 꿈을 좇으며 보낸 시간이다. 열여덟 살 때 나는 대학에 가는 대신 요세미티 계곡으로 갔다. 그 몇 달은 내 안에 평생의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열정은 수십 년 동안 나를 매혹시키면서도 가르쳐 왔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우리는 엘 캐피탄의 수직 암벽을 오르는 기술 등반 루트인 퍼시픽 오션 월에서 나흘째를 맞고 있었다. 엘 캐피탄은 요세미티에서 가장 위압적인 거대한 단일 암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의 눈으로 생생히 볼 수 있다.

우리는 계곡 바닥에서 2,000피트가 넘는 높이에 있었다. 더크가 A5 피치를 선등했고, 찰스가 그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확보 지점에 매달린 채 홀로, 세 번째 등반자로서, 찰스가 작업을 끝내 내가 다음 확보 지점까지 자유롭게 늘어진 로프를 따라 주마르로 올라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멍하니 공상에 잠겨 있던 나는 비명 소리에 깨어났다. 아래쪽 오른편을 내려다보니, 다른 한 팀이 바로 근처 등반을 막 시작한 곳이었다. 개미만 하게 보이는 사람이 암벽 아래에서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시 비명이 들렸다. 이번에는 도와 달라는 외침이었다.

찰스는 장비 정리를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위쪽 확보 지점에 있던 더크가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나는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러나 다음 순간, 처음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자 나는 알게 되었다.

저 아래 작디작은 형체의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절박함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암벽 아래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모여 있는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광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특별한 전문 지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며칠 뒤 우리가 등반을 마쳤을 때 알게 되었듯이, 내 추측은 맞았다. 그 끔찍한 아침, 크리스 로빈스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로질러 놓인 로프를 주마르로 오르고 있었다. 로프가 끊어졌고, 로빈스는 추락하여 사망했다.

이 일을 쓰면서 나는 1979년 봄의 내 일지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우리가 퍼시픽 오션 월에서 보낸 7일에 대해 기록을 남겨 두었었다. 그런데 그 짧은 기록들 속에는 크리스 로빈스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 나는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한순간 가까이 다가왔지만, 내 삶에서는 멀리 떨어진 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풋풋한 나날 속에서, 나는 죽음이 등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퍼시픽 오션 월에 있던 우리 셋이 젊은 남자 특유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믿음에 아무리 젖어 있었다 해도, 찰스와 더크와 나는 우리가 스스로 다가가고 있던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반 다스쯤 되는 코퍼헤드 확보물을 지나 세 번째, 네 번째 후크 동작을 이어 갈 때, 깊은 불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안전한 순간들조차 불안으로 물들어 있다. 견고한 확보 지점에 매달려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상 2,000피트 위의 수직 암벽에 매달려 있을 때, 당신은 중력의 끌어당김을 느낀다. 무언가 잘못되면 끝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험은 우리를 밀어낸다.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 끝에 다가갈 때 매우 조심한다. 흔들거리는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일에도 당연히 의심을 품는다. 우리는 살고 싶어 한다. 등반에서 로프와 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 욕구에 대한 응답이다. 안전 조치는 등반 기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은 확보 지점을 설치하는 법, 장비를 설치하는 법, 확보하는 법, 하강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도 질문은 분명하다. 왜 애초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가? 아름다운 산길을 걷고, 언덕의 쉬운 비탈을 기어오르는 데 만족하면 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신비롭다. 죽음의 위험은 밀어내지만 동시에 끌어당긴다. 어떤 사람들은 좁은 산길에서 빠르게 차를 모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운전이라는 과업에 자기 존재 전체를 쏟아부을 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로를 벗어나 산비탈 아래로 곤두박질칠 가능성이 그들의 의식 맨 앞에 놓여 있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가능성을 느낀다. 이상하게도 그 느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운전석에서의 경험을 어둡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속하고, 방향을 틀고, 제동하고, 다시 가속하는 행위와 하나가 되어 자신에게 온전히 현존하게 만드는 집중력의 힘을 강화한다. 위험은 과거가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힘을 끊어 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몰아낸다. 위험은 현재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위태로움은 살아 있다는 깊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험은 귀중하다.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삶은 쉽게 붙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다른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거나, 무리를 따라가며, 온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산다. 젊은 시절의 나를 보라.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일관된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리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나 자신을 찾을”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많은 시간, 곧 열린 미래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다. 물론 우리는 삶이 더 많기를 원하지, 더 적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다는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미루게 만든다. 내년에, 이 학위를 마치거나 이 승진을 이루고 나면, 나는 내 삶에서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이정표에 도달하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한다. 그러나 언제나 또 다른 장애물이 있고, 또 다른 이정표가 있다.

죽음은 모든 물음에 결말을 짓는다. 내가 죽고 나면, 나는 내가 살아온 바로 그 사람이었을 것이며, 다른 누구도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완결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에 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올 때에는, 모든 것을 헤아리고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영혼의 불멸을 확언하지만, “총결산”은 우리가 사후에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우리 종말에 대한 예감은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할 수 있다. 죽음의 전망은 명료함을 가져올 수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의 죽음을 정기적으로 관상하는 영적 수련을 길렀다.

그것은 ‘memento mori’, 곧 “너는 죽어야 함을 기억하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가 죽음의 현실을 눈앞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자신이 참으로 무엇을 갈망하는지, 실제로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무엇과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지 더 잘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등반가들이 유독 지혜롭거나 자기 인식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가오는 죽음의 현실을 밀어내려 한다. 등반 중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나라면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아니면 그저 다른 생각을 하며 야영장에서 이 말 저 말 떠들어댄다.

최악의 순간에는 등반가들이 겉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지만, 내적으로는 자주 느끼는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크리스 로빈스가 죽어서 우리의 죽을 운명을 상기시킨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는 식이다.

그럼에도 등반의 치명적 위험은, 등반가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라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의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메멘토 모리’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여러 차례 어려운 지점에 처했을 때, 위험의 요소는 나의 자기 현존감을 고양시켰다. 그 순간의 요구가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일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면 죽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다. “누군가”가 그 동작을 해내거나, 어쨌든 그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한다.

이 어려운 순간들 속에서 나는 살고자 하는 내 의지를 강렬하게 느낀다. 그것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극도로 집중된 감각으로, 나의 자기 이해를 하나의 과업과 목적 안으로 수렴시킨다.

초점 없이 흘러가고 부딪히는 삶의 많은 순간들과 달리, 이렇게 노출된 상황 속에서 나는 금강석처럼 단단한 명료함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갈망하는지 안다. 바로 그 동작을 해내는 것이다. 손가락은 섬세한 홀드를 붙잡고, 발은 조심스럽게 위치를 잡으며, 정신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다. 내 삶 전체가 이제 이 한순간에 응축된다.

이것은 역설이다. 죽음의 어둠은 기묘한 빛을 드리운다.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 빛은 더욱 찬란해진다. 위험은 상황의 긴급함 때문에 내 의식에서 완전히 추방되어 있음에도, 살아 있다는 나의 감각을 더욱 고양시킨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Copyrights ⓒ 리베르타임즈 & www.libertimes.kr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더보기 리베르타임즈
댓글 :0
댓글 등록
0/400
  • 작성자명 |2024.11.14 10:30
    이곳은 댓글 작성한 내용이 나오는 자리 입니다.
1 2 3 4 5
리베르타임즈로고

신문사소개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도희윤) | 기사제보 | 문의하기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길 12 타운빌 2층 | 이메일: libertimes.kr@gmail.com | 전화번호 : 02-735-1210
등록번호 : 415-82-89144 | 등록일자 : 2020년 10월 7일 | 발행/편집인 : 도희윤
기사제보 및 시민기자 지원: libertimes.kr@gmail.com
[구독 / 후원계좌 : 기업은행 035 - 110706 - 04 - 014 리베르타스협동조합]
Copyright @리베르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