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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92] 수호할 만한 신앙이 없다

2026-07-07 06:40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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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R. 트루먼 Carl R. Trueman is a professor of biblical and religious studies at Grove City College and a fellow at the Ethics and Public Policy Center. 윤리·공공정책센터 연구원


버킹엄궁은 잉글랜드 국교회와 관련한 군주의 역할에 대한 공식 설명을 갱신했다. 이제 국왕은 더 이상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가 아니다. 오히려 “폐하께서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이시며, 다종교 국가 안에서 신앙을 위한 공간을 보호하신다.” 그 설명은 수사적으로는 고무적이지만, 교의적 내용은 상당히 비어 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사소한 문안 수정이 아니다. 그것은 잉글랜드 문화의 중심부에 있는 더 깊은 문제를 가리킨다. 새로운 공식은 굳건한 형태의 그리스도교가 잉글랜드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생각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잉글랜드 문화가 현재의 종교적 스펙트럼을 다룰 도구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그 문화가 의지하는 것은 다문화주의의 상대주의적 경건성뿐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다른 종교들, 특히 이슬람은 그러한 경건성을 거부한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국왕의 포부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확신과 일치한다. 여러 해 동안 당시 찰스 왕세자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영국의 국가원수가 되면 “신앙의 수호자”라는 말을 “신앙 일반의 수호자”로, 혹은 그 뜻을 분명히 하자면 “여러 신앙들의 수호자”로 재해석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 칭호는 본래 교황이 마르틴 루터에 맞서 가톨릭을 변호한 헨리 8세에게 부여한 것이었으나, 종교개혁 과정에서 빠르게 변형되어,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서 그 가르침과 전례를 수호하는 군주의 역할을 가리키게 되었다. 오늘날 이 점에서 군주의 역할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국왕의 잘못이 아니다.

국왕에게는 우리가 동정할 만한 문제가 적어도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위태로운 상태다. 국왕이 수호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신앙을 정의하는 문제에서, 교회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진보적 성공회는 더 넓은 문화가 겪는 도덕적 혼돈의 한 부분집합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퀴어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정통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배제하는 포용성 말고는 아무런 긍정적 전망도 없이 기이한 주변부에 영합한다.

그 복음주의적 상대편은 오랫동안 퍼블릭스쿨, 곧 엘리트 사립학교 출신 남학생들이 지배해 왔으며, 엄밀한 의미의 신학에 대한 의심과 교회론에 대한 조급함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이 “고기 잡기에 가장 좋은 배”라는 통상적인 복음주의적 주장은 언제나 경건한 수사를 이용해 잉글랜드 국교회라는 더 넓은 재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편리한 방식이었다.

그렇다. 몇몇 성공회 친구들이 지적했듯이, 나 자신의 전통인 장로교 역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서, 교회론 논의에서 그것이 피장파장의 오류라는 성격이 조금도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사립 명문학교 출신 성공회 복음주의는 조너선 플레처와 고(故) 존 스미스를 둘러싼 끔찍한 학대 추문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진보주의도, 사립 명문학교식 복음주의도, 국왕에게 수호할 만한 신앙에 대한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도덕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둘째 문제는, 영국이 이제 “다종교” 국가일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종교가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국은 공적 삶에서 종교의 역할을 논의할 어휘를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도 잉글랜드 국교회는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영국에서 다문화주의는 실제로 잉글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폄하하는 것을 뜻해 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역할, 적어도 교회적 형태의 그리스도교의 역할 또한 폄하되었음을 의미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신앙이 용서의 원천임을 가리키며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교회는 그 문제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교회의 공적 신학은 종종 최신 좌파적 경건성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이 1980년대 대처주의에 대한 거부이든, 전직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복음주의자의 조력자살 지지이든 말이다.

과거 교회의 문제가 “기도하는 토리당”처럼 기능했다는 데 있었다면, 지금의 문제는 교회가 하나의 정치적 동맹을 똑같이 세속적인 또 다른 동맹으로 단순히 바꾸어 버렸다는 데 있다. 오늘날 잉글랜드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가장 공적인 형태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그래 왔듯이 포이어바흐에게 바치는 송가, 곧 종교적 어법으로 표현된 세속적 인간학에 지나지 않는다.

잉글랜드의 공적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래전에 모든 교리적 내용과 반문화적 날카로움을 상실했다. 잉글랜드 국교회가 여전히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국민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1년에 한 번이라도 예배에 참석한다는 사실은, 그 교회가 엄밀한 교리적·전례적 근거가 아닌 다른 근거 위에서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영구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문화주의는 독단적인 반독단주의와 결합된 문화적 관련성을 요구하며, 무자비한 주인으로 드러났다.

그 결과, “신앙 일반의 수호자”가 되고자 하는 국왕의 포부는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을 수호한다는 것은 종교의 중요성에 대한 어떤 모호한 감각을 수호한다는 뜻이다. 단기적으로 이것은 다른 종교들이 이제 상당한 존재감을 갖게 된 사회에서, 군주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진리 주장을 단언함으로써 야기할 수 있는 정치적 긴장을 완화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잉글랜드에는 그리스도교가 더 넓은 문화를 누룩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의미한 제도들이 없다. 사실 공론장에서 그리스도교를 특별히 논의하거나, 심지어 종교 일반에 대해 의미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어휘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찰스 국왕의 신중한 모호성은 그 원인이 아니라, 단지 그 증상일 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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