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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405] 아프리카 교회의 돌연한 죽음

2026-07-20 07:50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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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P. 커틴 D. P. Curtin is editor in chief of the Scriptorium Project. 스크립토리움 프로젝트 편집장


문명의 완전한 붕괴는 흔한 일이 아니다. 서방 세계에는 이른바 ‘야만족’ 집단들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과거와 오늘날의 국가들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로마령 갈리아에 정착했던 고대 민족 프랑크족은 로마 문화에 의해 형성되어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인이라고 부르는 민족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속성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 곧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고 잿더미의 흔적만 남는 경우는 어떠한가? 바로 이것이 로마령 북아프리카에 일어난 일이다.

북아프리카에는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더 넓은 로마 세계에 깊이 속해 있던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 그 문명의 심장이었던 아프리카 교회에는 오늘날 살아 있는 후계자가 없다.

아프리카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지적으로 가장 강력한 교회 가운데 하나였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시대부터 카르타고의 거리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카르타고는 서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으며, 국제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마도 로마에 버금가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그곳에서 비옥한 토양을 발견했다. 카르타고는 테르툴리아누스와 성 치프리아노를 배출했다. 이들은 성장하던 교회의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지성의 거인들이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던 로마 제국의 다른 많은 지역과 달리, 북아프리카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문화적 영향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지배적인 로마 문화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로마가 수 세기 전에 그 위에 자신의 문명을 세웠던 더 오래된 포에니 문명 역시 남아 있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문화적 분화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인이었고, 어머니 성녀 모니카는 포에니인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재임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자신의 교구를 훨씬 넘어섰다. 히포 레기우스와 카르타고에서 열린 시노드와 공의회들을 통하여 서방 교회의 성경 정경이 채택되었으며, 이는 이후 11세기 동안 다시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원죄,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서방 수도생활, 윤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 발전했고, 이후 라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전해졌다.

아우구스티노 시대의 북아프리카는 그리스도교가 밀집해 있던 문명이었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주교좌가 있었고, 시노드가 빈번하게 개최되었으며, 교회 규율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 아래 서방 수도생활이 탄생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수십 차례의 공의회에 참여했으며 주교, 수도자, 제국 관리, 교황들과 방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아프리카 교회는 전통과 성사 신학에서 깊이 가톨릭적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지역주의와 윤리적 엄격주의로 특징지어졌다.

430년, 반달족이 히포 레기우스를 포위하는 동안 아우구스티노가 선종한 사건은 5세기 아프리카 교회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비유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곧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반달족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가톨릭 성직자들을 추방하며, 아리우스 이단을 강요함으로써 그 지역을 굴복시켰다.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자 아프리카 교회의 잔존 세력은 이탈리아와 남부 갈리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 야만족의 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게르만 부족이었던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낯선 환경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따르는 복잡한 행정과 물류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동로마 제국은 533년, 큰 유혈 사태 없이 이 지역을 탈환했다. 그러나 이미 피해는 발생한 뒤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인구가 크게 감소했고, 인구학적 쇠퇴와 경제적 와해로 인해 그 지역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오히려 강화하곤 했던 이전의 로마 박해들과 달리, 반달족의 아리우스주의는 교회의 지도부와 성사생활의 생명력을 겨냥함으로써 아프리카 교회를 내부에서부터 텅 비게 만들었다.

더욱이 당시 제국의 주요 신학 논쟁, 특히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논쟁은 라틴어권 서방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어권 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스어가 620년에 공식 언어로 라틴어를 대체한 새로운 로마 제국에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라틴어에 결속되어 있던 아프리카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적 문화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치명타는 아라비아의 평원에서 쏟아져 나와 이집트와 시리아로 진격한 아랍 군대가 부상한 7세기 후반에 가해졌다. 칼리파국의 군대는 647년에 로마령 아프리카를 점령했지만 로마군에게 쫓겨났고, 698년에 승리자로서 다시 돌아왔다. 아랍인들은 카르타고와 그 주변의 제도와 시설들을 장악함으로써 대 카토의 오래된 요구를 실현했다.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

디도와 한니발의 고대 도시 카르타고는 모든 궁전과 문서고와 성당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아랍 군대는 인근의 도시 튀니스에 본부를 설치하고, 카르타고의 폐허에서 가져온 자재를 건축에 사용했다. 파괴된 뒤에도 카르타고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명의 주교좌로 남아 있었으나, 1964년에 영구적으로 폐지되었다.

아랍의 침공 이후 북아프리카 교회에 관해 현존하는 기록은 거의 없다. 마치 한 문명 전체의 불빛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영원히 꺼져버린 것과 같다. 남아 있는 서신도 없다. 아프리카 출신의 어느 주교가 망명하여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이나 로마에 머물렀다는 단편적인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아프리카 교회의 운명에 관해 어떠한 설명도 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주교좌 간 연계망이나 수도원, 교육기관이 없었던 교회는 서서히 시들어갔다. 경제적·문화적 압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그리스도인의 수를 꾸준히 감소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라틴 그리스도교 문화는 완전히 사라졌고, 희미한 고고학적 흔적만 남았다.

북아프리카의 옛 로마 도시 일부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축복문이 새겨진 라틴어 묘비들이 서 있다. 이것들은 아프리카 교회와 로마-포에니 문명이 남긴 마지막 물질적 흔적이다. 후기 로마령 아프리카의 종말기 상태를 조금이라도 밝혀주는 마지막 문헌은 교황들의 서한이다.

10세기의 서신 일부가 남아 있으며, 특히 11세기에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카르타고의 두 주교에게 라틴어 서한이 보내졌다. 이 서신들은 점령 3세기가 지난 뒤 아프리카 전체에 주교가 단 다섯 명만 남아 있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세기 뒤 알모하드 왕조의 칼리파 아브드 알무민은 이 지역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개종하지 않으면 처형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 이후 아프리카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버렸다.

말기의 아프리카 교회는 마지막으로 한 명의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오늘날 ‘아프리카인 콘스탄티누스’로 알려진 의사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카르타고 출신의 난민으로서 이탈리아 중부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랍어 의학 문헌 전체를 서방 세계에 소개했으며, 유럽에서 서양 의학이 다시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전기 작가인 베드로 부제는 그를 사라센인이라고 묘사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라틴어에 대단히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아프리카 교회의 마지막 잔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아프리카 교회의 소멸은 문화와 그 교육적 동반자인 교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엄중한 진실과 우리를 마주하게 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3세기에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시 말해, 문화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아프리카 교회는 서방 그리스도교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라틴 세계에 교리와 규율과 신심의 언어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서방을 그토록 자신 있게 형성했던 바로 그 아프리카 교회는 교회가 지닌 자연적 생명력이 문화와 언어, 사회 제도에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문화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 교회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와 학교, 시민적 연계망과 공통 언어가 살아 숨 쉬는 세계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은 교회의 가르침이 공유되고 전승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구조들이 붕괴하고 라틴어 문해력이 쇠퇴하자 주교직의 계승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사적·교육적 뿌리에서 단절되었을 때, 교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요한 묵시록의 흰 말을 마주했다.

이 역사가 우리 시대에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정통 신앙만으로는 아프리카 교회를 보존할 수 없었다. 순교자들이 보여준 영웅적인 성덕도 교회를 구해내지 못했다. 문화적·공동체적 삶의 연속성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말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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