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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필리버스터는 단순히 긴 연설을 이어가는 정치적 행사가 아니다. 의석수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수파가 국회의 연단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다수의 힘만으로 밀어붙이는 법안의 문제점을 국민에게 알리고 법안 처리를 지연시키는 의회민주주의의 비상수단이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이지만,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다수결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소수의 발언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충분한 토론과 숙의가 선행되어야 하며,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장치들이 사라진 다수결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숫자를 앞세운 지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국회의 필리버스터는 그 본래 기능을 잃고 있다. 소수 야당 의원들이 밤을 새워 연설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거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표결로 토론을 끝내고 법안을 통과시킨다. 필리버스터는 법안 처리를 실질적으로 저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대 여당이 “야당에도 말할 기회를 주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있다.
야당 의원들은 목이 쉬도록 연설하고, 여당 의원들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린다. 국민은 국회의 대립을 지켜보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결국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폭주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 폭주 과정에 절차적 구색을 갖춰주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국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법안조차 거대 여당이 작심하면 어렵지 않게 통과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기관을 특정 정치세력의 영향력 아래 두며, 사법과 언론의 독립을 흔드는 법안이라도 의석수만 충분하면 입법의 이름으로 강행할 수 있는 구조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적 헌정질서와 충돌하는 이른바 ‘공산주의법’이라 해도, 거대 여당이 당론으로 밀어붙이면 국회 안에서 이를 실질적으로 막을 방법이 거의 없다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법안의 내용보다 의석수가 우선되고, 국민적 합의보다 당 지도부의 명령이 앞선다면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다수당의 입법 공장이 된다.
그렇다면 야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형식적인 필리버스터를 한 차례 진행한 뒤 “우리는 할 만큼 했다”며 물러나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설만 반복해서도 안 된다. 소수 야당이 정말 그 법안을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한다면, 그 판단에 상응하는 정치적 책임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
국회의원 100명이 정치생명과 의원직을 걸어야 한다.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에서 비폭력적인 연좌와 철야 농성을 이어가고, 모든 법적·헌법적 수단을 동원하며, 헌법재판과 권한쟁의,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촉구, 국민투표 요구, 전국적인 국민보고대회와 서명운동에 나서야 한다. 필요하다면 의원직 총사퇴까지 공개적으로 결의하고 국민에게 직접 신임을 물어야 한다.
국회의원은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선출된 사람이 아니다. 헌법과 국민의 자유를 지키라고 국민이 권한을 위임한 공직자다.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의원직과 정치적 미래는 안전하게 보존하려 한다면, 국민은 그 절박성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끝난 뒤 법안은 통과되고, 야당 의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며, 다음 선거의 공천만 계산하는 정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필리버스터는 저항이 아니라 면피이고, 투쟁이 아니라 공연이다. 오히려 거대 여당에 “절차를 모두 지켰다”는 알리바이만 제공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연설시간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정치적 책임의 무게를 늘리는 일이다. 백 번의 무제한 토론보다 의원직을 건 한 번의 결단이 더 강력할 수 있다. 국민에게 법안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한다면 국회 연단뿐 아니라 거리와 광장, 법정과 헌법기관에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
거대 의석의 폭주를 막지 못한 채 필리버스터를 했다는 기록만 남기는 것은 역사 앞에서 아무런 변명이 되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헌정질서가 정말 위기에 처해 있다면, 야당 의원 100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