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캐나다 하원은 형법에 규정되어 있던 선의의 종교적 의견 변론(good faith religious opinion defense)을 폐지하기로 표결하였다. 이 변론 조항은 1970년부터 존재해 왔다.
이 조항은 선의로 종교적 주제에 관한 의견, 혹은 종교 문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의견을 표현하거나 논증을 통해 입증하려 한 사람을 보호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블록 케베코아는 정부의 반혐오 법안에 대한 지지 조건으로 이 조항의 폐지를 요구했고, 자유당은 이를 수용하였다.
정부는 대법원의 협소한 ‘형사상 증오’ 정의가 이미 진지한 종교적 발언을 배제하고 있으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성윤리나 가정법에 관한 까다로운 성경 구절을 설교한 캐나다의 목사나 이맘이, 진지한 종교적 논증이 범주적으로 보호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형법상의 명시적 조항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조항은 위태로워졌다. 이 조항을 삭제하려는 제안은 종교 공동체에게, 국가의 눈에 자신들이 이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 준다.
내가 보기에, 지금 캐나다가 하고 있는 일은 새로운 종류의 세속주의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을 공세적 세속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국가를 신학으로부터 떼어 놓는 세속주의, 곧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실천하고 있으며 나 또한 존중하는 그런 종류의 세속주의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더 공격적인 무엇, 곧 공공 고용에서 종교 상징을 금지하는 정책을 통해 퀘벡이 오랫동안 실험해 왔고, 이제 블록 케베코아가 이를 연방 형법으로까지 확장한 바로 그것이다. 이 세속주의는 단지 국가가 종교를 강요하지 못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압축하며, 불편한 말을 할 때 진실한 확신마저 의심받아 마땅한 또 하나의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다.
사법상의 문턱은 검사가 기소한 뒤 무엇을 입증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반면 법정 변론은 시민들에게 말하기 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50년 동안, 이제 폐지된 이 변론 조항이 증오를 가려 주는 데 성공적으로 원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조항이 한 일은, 형법이 진지한 교리적 논증과 형사상 비방 사이에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 준 것이었다. 이제 그 고지가 위험에 처해 있다.
이 폐지는 국가가 종교를 특별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나는 이 전제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찰스 테일러는 왜 그런지를 수십 년에 걸쳐 설명해 왔다.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주의는 공적 삶에서 종교를 빼냄으로써 생겨나는 중립적 기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입장, 곧 그가 “내재적 틀(immanent frame)”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안에서 신앙과 불신앙은 더 이상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선택지가 된다.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담론에서 법적 보호를 제거하는 국가는 중립을 달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편을 든 것이다.
테일러는 퀘벡의 ‘합리적 조정’ 위원회를 직접 이끌었고, 다양한 사회는 종교적 확신을 하나의 세속적 틀 안으로 납작하게 눌러 넣는 대신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그가 “열린 세속주의”라고 부른 것을 권고하였다. 법안 C-9가 제정된다면, 그것은 정확히 그 반대를 행하는 셈이다. 세속적 입법부가 종교적 이성이 더 이상 독자적인 법정 변론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결정하는 반면, 다른 모든 형태의 공익적 발언은 여전히 그러한 변론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위르겐 하버마스조차도, 급진적으로 세속적인 출발점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2004년 요제프 라칭거와의 대화에서, 하버마스는 자유주의 국가는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규범적 원천들에 의존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세속 시민들이 종교적 기여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그가 말한 “인지적 의무(cognitive duty)”를 진다고 주장하였다. 진지한 종교적 논증에 대한 법적 인정을 박탈하는 형사 법규는, 하버마스가 권고한 것과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 문제를 중시하는 것은 단지 법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종교 자유가 매우 빈약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이기도 하다. 종교 자유는 흔히 여러 권리 가운데 하나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이 걸려 있는지를 놓치는 태도다.
종교 자유는 양심에 관한 자유이며, 어떤 자유도 이보다 더 깊지 않다. 이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라. 탈무드의 성윤리를 가르치는 랍비나,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천명하는 가톨릭 주교가, 자신들의 선의에 대한 명시적 법적 인정이 철회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은 여전히 형사상 증오에 대한 높은 문턱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이 애초에 법이 보호된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는 보장을 잃어버린 것이다. 뉴먼은 양심을 “그리스도의 원초적 대리자(aboriginal Vicar of Christ)”라고 불렀다. 곧 어떤 제도나 법정보다 앞서 영혼 안에서 말하는 목소리라는 뜻이다. 국가의 권위가 아무리 광범위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그 문턱에서 한계를 만난다.
이 폐지는 가톨릭 주교들, 이슬람 단체들, 정교회 랍비들, 복음주의 교회들, 그리고 캐나다 시민자유협회의 일치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졌다. 제1계명은 이러하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을 녹여 송아지를 만들고 광야에서 그것을 경배함으로써 그 계명을 어겼다.
그들이 처음부터 우상숭배를 저지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두려웠고, 불편할 만큼 침묵하게 된 하느님 대신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을 원했던 것이다. 무엇이 거룩한 것에 관한 확신이며, 어떤 확신이 공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의회는, 자기 자신의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 상원은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