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명: 뉴스홈 > 오피니언 > 종교 기사 제목:

[USA 가톨릭 335] 도덕적 확실성과 이란 전쟁 ①

2026-05-11 07:11 | 입력 : 리베르타임즈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X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링크 복사

스티븐 A. 롱 Steven A. Long is a professor of theology at Ave Maria University. 신학 교수


현재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은 가톨릭 전통 안의 정의전쟁론에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다섯 가지 사항이 중요하다. 특히 네 번째 사항은 전쟁 개시의 정당성, 곧 ‘전쟁개시권’에 관한 것이다.

첫째, 우리는 가톨릭 정의전쟁 전통이 오직 방어전만을 허용한다고 반복해서 듣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참일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모두 불의에 대한 처벌이 정의전쟁에 요구되는 핵심 요소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정의전쟁은 필연적으로 응보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처럼 “악을 응징하는 것”이며, 아퀴나스의 표현처럼 “어떤 잘못 때문에” 무력으로 책망받을 만한 행동을 한 자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유엔 헌장은 징벌적 전쟁을 비난한다. 아마도 이는 과거의 잘못을 구실로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불균형한 해악을 가하는 전쟁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적 관점에서 볼 때, 정의는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요컨대 가톨릭 정의전쟁론은 결코 순수하게 방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선을 옹호하기 위한 정의의 행위로서 무력 사용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정의는 법정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정의전쟁론에서 “예방전쟁”이 허용될 수 없다는 말은 “순수한 예방”의 경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어떤 국가나 다른 주체가 이미 통상적이든 비통상적이든 공격적 군사행동의 양상을 보이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이와 달리, 한 적대자가 이미 치명적 행동의 명백한 사실상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한 나라의 시민과 군인을 살해하고, 공직자를 암살하려 하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대리 세력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는 등의 경우이다. 이때 예방은 그러한 지속적 적대 관계의 맥락 안에서 평가된다. 이는 해당 사안의 사실관계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는지 여부와 무관하다. 한 나라에 대해 실제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은, 국가가 전쟁을 선포했는지와 구별되는 문제로서, 전적으로 법적 선언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우선 현실에서 하나의 사실적 상태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적 상태는 장래의 해악 가능성과 무엇이 실제 위협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도덕적 판단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의 여러 대통령들은 핵무기를 보유한 이란이 미국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왔다. 이는 이란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향해 군사력과 대리 테러를 투사해 왔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여러 행정부의 공적 판단이었다.

셋째,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표현 안에 담긴 열망은 고귀하다. 이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고귀한 것과 같다. 강제로 부과되는 정의의 필요성을 가져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무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한, 국가는 필요하다면 군사력 사용을 통해서라도 자기 사회의 공동선을 옹호할 의무를 지닌다.

교황 레오 14세가 하느님께서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정의롭지 않게, 연민도 도덕적 나침반도 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폭력적 불의를 억제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나라의 공동선을 섬기는 이들조차 하느님께 기도할 때 듣지 못하신다는 식의 포괄적 단죄로 읽었다.

그렇게 되려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하고, 교부들과 교회학자들의 가르침을 잊어야 하며,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로마 백인대장을 위해 가장 놀라운 기적 가운데 하나를 행하셨다는 사실도 잊어야 한다. 분명히 교황이 전하고자 한 뜻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공동선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이해가 중요하다. 현대의 신학자들이나 정치인들 가운데 “공동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많지만, 공동선이 정치적 원리이기 전에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원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이들은 너무도 적다. 공동선은 “사적” 선이나 “개별적” 선을 초월한다. 또한 공동선은 단순한 공통의 수단이나 집단적 이익도 아니다.

사람들은 더 낮은 전화요금을 위해 죽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의와 진리, 가족과 조국의 선을 위해 죽는다. 공동선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공동선을 섬긴다는 것은 집단 안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간성의 가장 고귀한 요구와 약속에 응답하는 것이다.

궁극적 공동선은 정치 공동체를 초월한다. 아퀴나스가 『대이교도대전』에서 쓰듯이, “하느님은 공동선”이시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의 결과가 아니거나 하느님께 질서 지어져 있지 않은 선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파괴적이다. 그 자체로 전쟁은 우정이나 공동선을 세워 올리는 것과 반대되는 일을 한다. 그러나 공동선을 괴롭히고 가로막는 악들을 제거함으로써, 정당한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면 훼손되고 파괴되며 위협받고 마비되었을 공동선들을 옹호할 수 있다.

넷째, 정의의 전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쟁을 위한 정당한 사유가 주어졌는가, 그리고 전쟁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공동선을 위해 정의롭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 상황이 전쟁을 통해 도덕적으로 선한 결과를 도덕적으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가져올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하여 전후 상태가 전쟁 이전의 상황보다 더 나아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 곧 ‘전쟁개시권’이 온전하게 성립하려면 이 두 요소가 모두 요구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적대자에 의해 전쟁의 정당한 사유가 주어졌다는 확실성과, 전쟁이 자신이 치유하려는 상황보다 더 나쁜 상황을 낳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성 사이의 차이이다. 두 번째 고려 사항은 첫 번째와 같은 의미와 같은 정도로 “확정”하기 어렵다.

영국이 나치에 맞서 폴란드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이들은 이 보장이 신중하지 못했으며, 나치의 침략을 가속화했고, 결과적으로 더 불리한 결과를 낳았으며, 영국이 당시 분명히 다가오고 있던 전쟁을 위해 급속한 군수 생산과 전반적 준비를 추진할 시간을 줄였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든, 사실은 어떤 목적이 선하다는 판단, 곧 폴란드를 도우려는 판단과, 그 목적이 특정한 시점이나 특정한 수단을 통해 합리적으로 달성 가능한지, 또는 더 나쁜 사태를 초래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전쟁 개시의 정의에 대한 포괄적 판단은 언제나, 또는 대체로, 전쟁 목적의 성격뿐 아니라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신중한 실현 가능성의 판단을 요구한다.

어떤 나라는 실제로 전쟁의 정당한 사유를 부여받았을 수 있다. 어떤 적대자가 이미 저질렀고, 추구하고 있으며, 장래에 예견되는 범죄와 해악이 정당한 책망을 받을 만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해를 입은 나라가 자신과 나머지 세계 등에 과도한 해악을 끼치지 않고 그러한 책망을 실행할 충분한 위치에 있는지는 불분명할 수 있다.

전쟁에서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가 너무 커서 어떤 나라는 대응을 삼가야 할 수도 있다. 또는 다른 조치들이 여전히 충분히 유망하여, 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행동할 정의로운 권한이 있는 나라라 하더라도 전쟁을 곧바로 해결책으로 삼는 것을 합리적으로 꺼리고 먼저 다른 수단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수단들이 실제로 이용 가능한지 여부 역시, 군사행동이 더 나쁜 결과가 아니라 더 나은 종합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신중한 판단의 문제이다. 평화적 수단이 모든 경우에 언제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전제이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Copyrights ⓒ 리베르타임즈 & www.libertimes.kr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더보기 리베르타임즈
댓글 :0
댓글 등록
0/400
  • 작성자명 |2024.11.14 10:30
    이곳은 댓글 작성한 내용이 나오는 자리 입니다.
1 2 3 4 5
리베르타임즈로고

신문사소개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도희윤) | 기사제보 | 문의하기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길 12 타운빌 2층 | 이메일: libertimes.kr@gmail.com | 전화번호 : 02-735-1210
등록번호 : 415-82-89144 | 등록일자 : 2020년 10월 7일 | 발행/편집인 : 도희윤
기사제보 및 시민기자 지원: libertimes.kr@gmail.com
[구독 / 후원계좌 : 기업은행 035 - 110706 - 04 - 014 리베르타스협동조합]
Copyright @리베르타임즈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