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은 배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므로 중동과 그 밖의 지역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최근 가톨릭권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고려하여, 24년 전의 한 칼럼 일부를 약간 수정하여 다시 소개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내가 그때 제기했던 요점들은 처음 제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잊어버린 듯한 하나의 진리를 가르쳤다. 곧 고전적 가톨릭적 의미에서 “평화”란 질서의 문제이며, 그 질서는 법과 정치를 통하여 세워지는 질서라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평화를 “하느님이신 창조주께서 인간 사회에 심어 주신 질서의 열매”라고 가르친 것을 인용한 뒤, 요한 바오로 2세는 “질서의 평화”가 매우 오랫동안 가톨릭의 규범적 평화 개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교황이 말했듯이, 1,500년도 더 전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세상 안에서 세워질 수 있고 또 세워져야 하는 평화는 올바른 질서의 평화, 곧 tranquillitas ordinis, 질서의 고요함”이라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에서 현대 교황 교도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가 “평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질서”를 의미한다. 곧 정의—사랑으로 형성된 정의—와 자유의 토대 위에서 정치와 법을 통해 세워지는 질서 말이다. ….
“평화”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평화”가 있다. 이는 은총의 선물인 내적 평온의 평화이다. 또한 이사야가 본 “주님의 산”의 환시 속 “평화”가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민족이 민족을 거슬러 칼을 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이사 2,4].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이며, 우리가 만드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평화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질서의 “평화”가 있다. 그것은 보다 겸손한 종류의 평화이다. 그것은 상처 입은 영혼들과 찢어진 마음들과 함께 공존한다. 그 평화 안에서 칼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칼집에 꽂혀 있거나 질서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아직 보습으로 두드려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이 현실 세계의 평화이며, 그것은 국가 내부에서,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서 세워질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이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민주적 정치 공동체 안에서 누리고 있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모든 미국인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다거나, 우리나라가 갈등이 전혀 없는 지대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평화 속에 있다. 곧 정의로운 정치 질서의 평화 속에 있다. 이는 종교적·인종적·민족적·철학적으로 극적인 다양성을 지닌 3억 5천만 인간들의 사회가 이룬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다.
왜 우리는 평화 속에 있는가? 우리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법과 정치, 입법부와 법원, 시민사회의 공개 토론이 그것이다.
동일한 종류의 “평화”는 국가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는 도구로 무기가 아니라 외교와 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도 성립한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프랑스인과 독일인이 성인이 되었기 때문인가? 제발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기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유럽 갈등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한 지역에 현실 세계의 평화가 존재하는 까닭은, 국제적 정치·법률·경제 제도들의 촘촘한 그물망이 프랑스인과 독일인에게 그들의 차이를 해결할 다른 방법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질서의 평화이다.
질서의 평화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5세기 초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들을 처음 정식화한 이래, 정의로운 전쟁 전통의 도덕적 사유가 회복하거나 세우고자 해 온 평화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전쟁 전통과 평화 추구가 어떤 식으로든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질서의 평화가 목적이다. 정의로운 전쟁 전통은 이렇게 묻는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비례적이고 분별 있는 무력 사용을 통하여 그 질서의 평화를 회복하거나 세울 수 있는가? 군사행동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평화라는 목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력 사용을 통해 추구되는 도덕적으로 방어 가능한 목표를 규정하는 일은, 정의로운 전쟁의 사고방식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핵심 요소이다. 바로 그 규정이 이번 행정부의 이란 모험에서는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목표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는 듯하다.
페르시아만에서 질서의 평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답변되어야 할 결정적인 정의로운 전쟁의 질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