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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역사의 비극은 기억되어야 한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하고, 국가권력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자유민주국가의 품격이며, 공동체가 상처를 치유하는 최소한의 도리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처음에는 “억울한 희생을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이어 “명예만이라도 회복해 달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보상을 요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비판 자체를 금기시하는 성역을 만든다. 더 나아가 특정 사건을 앞세워 사회 전체에 강요된 참배와 침묵을 요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국민의 입을 막으려 한다. 이것은 추모가 아니라 정치 권력화다.
최근 5·18을 둘러싼 여러 논란을 보면 제주 4·3의 전개 과정이 겹쳐 보인다. 두 사건 모두 억울한 희생자가 있었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부 세력은 그 아픔을 공동체의 화해로 이끄는 대신, 정치적 무기와 신분적 특권의 근거로 삼아왔다. 역사적 비극이 어느 순간 특정 진영의 독점 자산처럼 취급되고, 국민 전체가 따라야 할 정치 의례로 변질되는 순간, 그 비극은 더 이상 치유의 기억이 아니라 분열의 도구가 된다.
참배는 강요될 수 없다. 추모는 자발적이어야 한다. 국민이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는 참배를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이미 추모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더구나 어떤 사건에 대해 질문하거나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낙인을 찍고, 법과 제도와 여론몰이로 입을 막는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성역 정치다.
역사는 질문을 통해 더 분명해진다. 진실은 검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사건만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오직 정해진 언어로만 말하라고 강요한다면 국민은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왜 이 사건만은 비판할 수 없는가.” “왜 이 이름 앞에서는 모든 국민이 침묵해야 하는가.” “왜 보상과 예우는 끝없이 확대되는데, 투명한 검증과 공개는 뒤따르지 않는가.”
국민이 경계해야 할 것은 희생자들이 아니다. 진정한 유가족과 피해자의 고통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앞세워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사회적 특권을 요구하며,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일부 ‘팔이 세력’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억울한 희생을 기억하자는 국민적 선의를 이용해 비판 불가능한 권력 지대를 만드는 행태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역사 왜곡이다.
5·18이든 4·3이든, 어느 사건도 특정 정치세력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적 비극은 국민 전체의 성찰 대상이지, 특정 집단의 면책특권이나 정치적 완장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성역화가 아니라 투명성에서 나온다. 진정한 화해는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 위에서 가능하다.
이제 국민은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누가 희생자의 명예를 진심으로 기리는지, 누가 그 이름을 팔아 권력과 보상과 신분을 요구하는지 분별해야 한다. 비극을 추모하는 일과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강요된 참배, 입틀막, 성역화가 계속된다면 역사는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적 반감만 키울 뿐이다. 5·18을 보면 4·3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과거의 상처만이 아니라, 그 상처를 이용해 오늘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위험한 정치의 그림자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