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생산을 임신과 출산에 비유하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상투적 표현은 영어라는 언어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하나의 생각을 ‘잉태한다(conceive)’고 말하지만, 어떤 생각은 ‘유산되고(abortive)’ 만다. 새로운 기획이나 사업은 ‘머릿속에서 낳은 자식(brainchild)’이며, ‘비옥한(fertile)’ 정신이 낳은 ‘소산(issue)’이다.
그러나 그것을 세상에 공개하기 전에는 일정한 ‘임신 기간(gestation)’이 필요하다.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아직 ‘배아 상태(embryonic)’이며, 고통스러운 ‘산고(labor)’를 거쳐야만 비로소 ‘분만될(delivered)’ 수 있다.
시인들은 이 비유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을 남김없이 짜냈다. 조지 터버빌은 자신의 소네트들을 겸손하게 “나의 불모의 두뇌가 맺은 덜 익은 씨앗들”이라고 내놓았다. 에드먼드 스펜서는 익명으로 발표한 『목자들의 달력』을 “그 부모가 알려지지 않은 아이”라는 고아로 세상에 내보냈다. 토머스 데커는 아이를 낳는 일과 책을 낳는 일을 구별했다. “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말을 하며,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을 건넨다.”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들 역시 이 비유에 깊이 매혹되어 있다. 이아고의 악마적인 “뮤즈는 산고를 겪고 / 이렇게 아이를 낳는다.” 머큐쇼는 “가장 다산적인 이야기꾼”으로, 로미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꿈에 관해 말한다. / 꿈이란 한가로운 두뇌가 낳은 자식들이지.” 티타니아와 오베론의 다툼은 “악의 자손”을 낳는다. 그리고 『한여름 밤의 꿈』 마지막 부분에서 테세우스는 시인과 연인과 광인이 모두 “알려지지 않은 사물들의 형상에 / 몸을 부여하는” 상상력을 드러낸다고 유명하게 선언한다.
한 학자는 이것을 저자론의 ‘남성적 모성’ 이론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관념은 19세기의 발자크와 20세기의 T. S. 엘리엇, C. S. 루이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보다 앞선 저술가들은 이 비유에 신학적 색채를 입혔다. 티머시 브라이트는 1586년에 출간한 『우울증에 관한 논고』에서 성령께서 혼돈으로부터 생명체들을 품어 부화시키고 길러 내신다고 썼다. 필립 시드니는 “신적인 숨결”에서 영감을 받은 시인이 “사실상 또 하나의 자연으로 자라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자연이 산출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자연 안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형상들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다.”
이러한 생각에는 성경적 선례가 있다. 시편 90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산들이 태어나기 전,
당신께서는 땅과 세상을 산고 속에서 낳으셨나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훌(chul)’은 산고를 겪는다는 뜻이다. 이사야서 42장에서 주님께서는 전쟁의 함성을 지르시는 동시에, 아이를 낳는 어머니처럼 숨을 헐떡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신다.
이 두 모습의 병치는 겉보기만큼 억지스럽지 않다. 전사와 어머니는 모두 위험에 처한다. 둘 다 무엇인가에 둘러싸인다. 여인은 자신의 산통에 둘러싸이고, 전사는 적들에게 포위된다. 전사들은 때때로 피를 흘리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피를 흘린다. 아이를 낳는 여인은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신음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새로운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는 순간 황홀한 승리를 경험하기도 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이사야서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그 의미를 정확히 포착했다.
“출산은 정복보다 더 경이롭고, 자기방어보다 더 놀라우며, 그 둘만큼이나 용기 있는 일이다.”
우상들과 달리 주님께서는 “이전의 것들”을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것들”을 낳으신다. 그분의 산고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신 창조의 첫 명령, 곧 “빛이 생겨라”라는 말씀을 되풀이한다(이사 42,16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의 숨결과 목소리로 새로운 것들을 낳으신다. 이는 태초에 성령과 말씀이 형태 없는 공허를 질서 있는 우주로 빚어내신 것과 같다. 창조주의 노동은 곧 산고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모상과 닮음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의 노동 또한 산고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은 인간의 노동을 어떻게 밝혀 주는가?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이 알고 있었듯이, 모든 노동은 잉태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학문적 통찰일 수도 있고, 예술적 영감이나 기업가적 착상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동정 잉태가 없다. 결실을 맺는 노동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교만과 오만한 고립은 그러한 수용성을 질식시킨다.
일단 잉태된 생각은 은밀한 곳에서 자라난다. 깊이 있는 창조에는 충분한 임신 기간이 필요하다. 조산한 아기들은 흔히 죽으며, 우리의 조급함은 사산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고통과 불확실성,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잉태한 것을 세상에 낳는다. 모든 생산적 노동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일단 산고가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다. 새로운 생명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까지 끝까지 견뎌야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여성주의자인 뤼스 이리가레는 모든 인간의 삶이 아늑했던 최초의 집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갓난아이는 첫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독립된 인간 존재다. 출생은 이후 삶에서 겪게 될 모든 떠남을 미리 보여 준다. 집을 떠나는 일, 독신 생활을 떠나는 일, 그리고 산 이들의 땅을 떠나는 일이다.
우리의 생산물과 기획도 마찬가지로 집을 떠나는 탕자들이다. 그것들은 마치 자기 자신의 생명을 지닌 것처럼 우리의 관리 능력을 벗어나 방황한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들을 계속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폭정이나 냉소적인 좌절로 이어질 뿐이다.
당신의 ‘아기들’이 집을 떠날 수 있도록 기르라. 그들은 반드시 떠날 것이며, 결국 당신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인간의 탄생은 동물의 탄생과 다르다. 새로 태어난 동물은 단지 그 종에 속하는 또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인간은 전례가 없으며 다시 반복될 수 없는 한 인격이다. 아렌트가 ‘탄생성(natality)’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성격, 곧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새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인간적 복수성이 이루는 관계망 전체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낳는 모든 ‘아기들’ 역시 이와 동일한 변혁의 잠재력을 지닌 채 세상에 들어오며,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것을 낳을 수 있는 인간 고유의 탄생적 능력을 표현한다.
“모든 노동은 산고다”라는 말은 억지로 꾸며 낸 시적 비유가 아니다. 모든 위대한 은유가 그러하듯, 이 은유는 자신이 가리키는 대상을 밝혀 주며, 어쩌면 그 대상 자체를 새롭게 빚어내기도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