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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열린 해단식 장면 - 도보단 제공 |
한 사람의 발걸음이 906,969번 이어졌다.
양팔이 없고 오른쪽 다리를 의족에 의지하는 ‘왼발박사’ 이범식 대신대학교 특임교수가 강원도 고성에서 인천 강화까지 접경지역 510㎞를 걷는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지난 7월 15일 고성에서 출발한 이후 한 달 동안 이어진 발걸음은 무려 906,969보. 숫자로만 보면 약 91만 걸음이지만 그 속에는 폭우와 무더위, 가파른 산길, 의족으로 인한 상처와 통증을 견디며 하루하루 길 위에 다시 섰던 시간이 담겨 있다.
한때 최종 해단식 장소를 둘러싸고 강화군청의 대관 거절 논란까지 불거졌지만, 이후 강화군청과 한국관광공사가 행정적 지원과 장소 대관을 협조하면서 긴 여정의 마지막도 의미 있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동쪽 고성에서 서쪽 강화까지…510㎞ 분단의 현장을 걷다
이 교수의 이번 도전은 희망길 프로젝트 ‘길을 잇다’의 하나로 추진됐다.
고성에서 양구·화천·철원·연천·파주·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접경지역을 걸으며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을 발걸음으로 잇는 여정이었다.
이번 종주는 DMZ 내부를 연속해서 통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접경지역의 역사·생태·안보 현장과 ‘DMZ 평화의 길’을 따라 분단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며 걷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철책과 군사시설, 지뢰 경고판이 이어지는 길은 한반도의 분단이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고성의 동해안에서 시작한 길은 곧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어졌다. 소똥령마을과 진부령 일대의 가파른 산길을 넘어야 했고, 평화의댐 주변에서는 철책과 군사표지판을 지나야 했다. 연천 일대에서는 사람 키에 가까운 수풀이 길을 막기도 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시야 확보조차 어려웠다. 평범한 국토종주라기보다 분단의 상처를 몸으로 확인하는 순례에 가까운 길이었다.
한 걸음마다 통증…906,969번의 ‘포기하지 않음’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험한 도로나 날씨만이 아니었다.
오른쪽 다리에 착용한 의족은 장시간 걷기가 계속될수록 압박과 마찰을 일으켰다. 상처가 생기고 피부가 벗겨져도 다음 날이면 다시 의족을 착용하고 길 위에 서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한 걸음이 이 교수에게는 때로 통증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과 같았다. 그렇게 하루의 걸음이 쌓였고 수천 보, 수만 보를 넘어 결국 906,969보가 됐다.
때문에 그의 기록은 단순히 ‘몇 걸음을 걸었는가’보다 몇 번이나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평가가 더욱 어울린다.
이 교수의 장거리 도전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그는 2024년 서울 광화문에서 경북 경산까지 462㎞를 31일 동안 걸어 약 65만9천 보를 기록했고, 2025년에는 광주에서 경주까지 약 400㎞를 걸으며 동서화합과 APEC 성공 개최의 메시지를 전했다. 올해 2월에도 대구에서 경북도청까지 약 140㎞를 걸었다.
1985년 산업현장 감전사고로 양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은 그는 남은 왼발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을 익혔고, 뒤늦게 대학에 입학해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거쳤다.
신체적 조건을 삶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바꿔온 셈이다.
완주 앞두고 불거진 ‘강화군청 문전박대’ 논란
하지만 510㎞ 대장정의 마지막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도보단 측에 따르면 이 교수는 지난 8월 10일 강화군청을 직접 찾아 광복절인 15일 해단식을 진행하기 위한 회의실 대관 협조를 요청했다.
당초 강화평화전망대에서 완주 행사를 갖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행사 진행에 적합한 공간 문제 등을 이유로 군청 회의실 사용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도보단 측은 당시 강화군청 비서실 관계자로부터 ‘단일 단체 행사’라는 이유로 장소 제공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510㎞를 걸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도보단이 정작 목적지 지방자치단체에서 해단식 장소조차 지원받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도보단은 성명을 내고 한국관광공사와 강화군청을 향해 “말로만 평화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길을 몸소 개척한 도보단의 뜻을 진정성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DMZ 평화·접경지역 관광을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우는 관계 기관들이 정작 현장에서 진행된 민간 평화 걷기 행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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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정에 함께 한 도보단 일행 - 도보단 제공 |
논란 하루 만에 전환.. “행정지원·장소 대관 협조”
상황은 언론 보도 이후 바뀌었다.
최성덕 DMZ 평화의 길 종주 도보단장은 13일 언론과의 통화에서 “한국관광공사와 강화군청이 행정적인 지원과 해단식 장소 대관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초 장소 대관 거절로 자칫 씁쓸하게 끝날 수도 있었던 대장정이 관계 기관의 협조로 다시 정상적인 마무리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과정은 민간의 자발적인 평화·통일 활동을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이 어떤 자세로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과제도 남겼다.
평화와 통일, 접경지역 활성화를 이야기하는 각종 정책과 행사가 실제 현장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거창한 구호 이상으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실천을 뒷받침하는 세심한 행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논란은 해소됐지만, 행정의 첫 대응이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불필요한 갈등 역시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번 도전의 본질은 행정 논란이 아니다.
이 교수는 길 위에서 줄곧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보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그는 양팔도 없고 오른쪽 다리 역시 온전하지 않다. 하지만 남아 있는 왼발 하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왼발로 공부했고, 컴퓨터를 사용했고, 다시 길 위에 섰다.
이번에는 그 왼발로 대한민국 동쪽 끝 고성에서 서쪽 강화까지 510㎞를 이어냈다. 그가 걸은 길은 단순한 장애 극복의 기록이라고만 표현하기 어렵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동쪽과 서쪽, 세대와 지역, 분단과 평화 사이에 놓인 간격을 사람의 발걸음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오늘 끝나는 것은 걷기이지 희망의 길이 아니다”
8월 15일 광복절과 함께 대장정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교수에게 완주는 종착점이 아니다. 그는 이번 종주를 마치며 “오늘 끝나는 것은 걷기이지 희망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며 “한 사람의 한 걸음이 또 다른 사람의 한 걸음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길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510㎞는 끝났다. 906,969보도 하나의 숫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특별한 이유는 한 사람이 중증 장애를 안고 먼 거리를 걸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넘어질 이유가 충분했지만 다시 일어섰고, 멈출 이유가 수없이 찾아왔지만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데 있다.
분단의 철책을 따라 이어진 906,969번의 왼발 걸음은 그래서 단순한 완주 기록보다 훨씬 큰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다.
“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이범식 교수가 고성에서 시작한 ‘희망의 길’이 강화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다.
김·희·철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