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대수명은 늘어났다. 1950년 이후 10년이 늘었고, 1900년 이후로는 30년이 늘었다. 좋은 일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새뮤얼 모인(Samuel Moyn)은 최근 저서 『미국의 노인 지배체제』에서 주장한다.
근대 세계는 젊음과 혁신, 새로움을 찬양했지만, 우리는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젊은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빼앗았다. 고령화 사회는 진보하기보다 기존의 것을 보존한다. 노인들은 부당하게 젊은이들을 억누르고 그들에게 돌아갈 유산을 움켜쥐는 한편, 권력의 모든 지렛대를 죽을힘을 다해 붙들고 놓지 않는다.
노인들은 죽어줄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는 죽음에 기초한다”는 콩트의 통찰, 곧 새로운 세대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앞선 세대가 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모인은 노인에 의한 과두지배, 이른바 ‘노인과두정(oldigarchy)’이 역사적으로는 일반적인 형태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舊체제)의 규범이며, 현대 사회라면 이미 오래전에 폐기했어야 할 낡은 규범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해관계가 있음을 인정해야겠다. 나 역시 바로 그런 늙은이들 가운데 하나다. 인정하기 괴롭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모인의 고발은 광범위하다. 노년층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꾸준히 투표한다.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투표자의 연령 중앙값은 52세다. 정치 후원금의 대부분도 노년층에게서 나온다.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우리 늙은이들을 대변하는데, 모인의 표현에 따르면 이 단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자금을 보유한 이익옹호단체”다. 우리 노년층은 “가장 큰 은행계좌와 주식 포트폴리오를 지배한다.”
21세기 첫 수십 년 동안 노년층이 가장인 가구의 순자산은 42% 증가한 반면, “18세에서 34세 성인 가구의 자산은 68% 감소했다.” 알짜 부동산의 대부분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연이어 두 명의 80대 대통령이 자리했고, 정치인 대부분은 온갖 형태의 권력을 장악한 특정 연령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수십 년 전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이 선언했듯,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늙었을 때보다 젊었을 때 가난할 가능성이 더 높은 사회”가 되었다.
모인은 이 모든 것이 미국 정치를 우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까다롭고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이민에 가장 완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남은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 노년층은 얼마 남지 않은 세월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개인적·정치적 시야를 좁힌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면서 그 비용은 미래 세대에 떠넘긴다. 기후변화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국가부채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종말이 닥칠 때까지 살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우경화 현상은 자유주의자인 모인에게 혼란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에게 임기 제한을 두고, 어쩌면 대통령에게도 임기 제한을 강화할 것인가? 모인이 보기에는 너무 온건하다. 미성년자들을 위한 대리투표제를 도입하자. “미국에서 노인 지배를 상징하는 기념물”인 상원을 폐지하자. 상원의원에게 최대 연령 제한을 두더라도 상원이라는 기관 자체의 존재가 여전히 “모욕적”이라는 것이다.
모인의 제안은 대체로 이런 방향이다. 젊은 세대에게 더 많은 힘을 주고, 노인들에게는 은퇴하고 재산을 이전하며, 품위를 잃어버리기 전에 품위 있게 무대에서 내려오도록 장려하기 위한 구조적·법적 개혁이다.
모인은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가 제안하는 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은 분명 문화적이며, 따라서 영적인 것이다.
우선 권력의 자리에 나이 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은, 오랜 세월 검증된 연장자들의 지혜에는 귀를 닫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경고가 된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모인이 제시한 역설 안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노인들이 자리를 내놓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우리가 ‘청년 문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활동적이며, 새로운 것을 탐험하고, 주름 없이 살고 싶어 한다. 일흔은 새로운 서른이라는 식이다. 우리는 고루한 현자가 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가 바로 현자다.
오이겐 로젠슈톡-휘시가 지적했듯이, 노인과 젊은이는 본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동시대인’이 아니라 일종의 ‘비동시대인’이다. 두 세대가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노인이 젊은이를 가르침으로써 미래를 향해 줄을 던지고, 젊은이가 노인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줄을 던질 때다.
우리가 노인에게 주어진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이미 젊은 세대와 완전히 같은 동시대인인 척한다면, 우리에게는 돈으로든 영적으로든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우리는 결국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쉰 목소리로 되풀이하는 메아리방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그 배후에는 우리가 유산을 물려줄 자녀를 충분히 낳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청년 문화는 우리를 타락시킨다. 아이들은 우리가 ‘최고의 삶’을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짐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우리는 출산을 미루며 자녀 수를 최소화한다.
노인들의 시간적 시야가 짧아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대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투자는 자녀를 두었을 때, 혹은 자녀에 준하는 관계를 맺었을 때 비로소 생긴다.
자원을 움켜쥐고,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려는 부모는 많지 않다. 우리는 자녀가 성장해 우리를 대신하기를 바란다.
15년 전에 누군가 내게 몇 살까지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면, 나는 일흔 살 정도면 만족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주들이 하나둘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 자녀들이 집을 떠났다고 해서 나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주들은 내가 바라보는 시간의 지평에 한 세대를 더 보태주었다. 이제 나는 증손주도 상당수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기를 바란다. (고손주까지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가능성은 낮다.)
내 개인에게 남은 시간의 지평이 짧아지는 바로 그 순간, 가족이라는 시간의 지평은 오히려 넓어졌다. 아내와 내가 살아서 우리 자녀들의 자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손주들은 일종의 기적적인 부활을 일으킨다. 그러나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부활을 아주 작은 규모로만 경험하거나, 아예 경험하지 못한다.
모인이 진정으로 노인 지배체제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그는 출산장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