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류 언론에서 포퓰리즘에 미래가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논하는 논평과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사실 “이것이 포퓰리즘의 종말인가?”라는 식의 글은 이미 한동안 계속되어 왔다.
2019년 『폴리티코』의 한 논평자는 “유럽은 포퓰리즘의 정점에 도달했는가?”라고 물은 뒤, “유럽 대륙 전역의 정치를 뒤흔든 反기득권 민족주의 운동에 맞서 흐름이 바뀌고 있을지도 모르며, 야만인들은 성문 밖에서 좌절감에 울부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영국의 대표적인 브렉시트 반대론자인 앤드루 아도니스는 2023년 『프로스펙트』에서 “우리는 포퓰리즘의 정점을 이미 지난 듯하다”고 예측했다. 그리고 올여름 초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자난 가네시는 자신의 글에 “포퓰리즘은 스스로를 잡아먹을 것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포퓰리즘의 종말을 바라는 이들과 다른 여러 저자들에게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파시즘을 달리 부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많은 낙관적인 관찰자들은 포퓰리즘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매개로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퍼 래시는 『엘리트의 반란과 민주주의의 배반』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목소리”라고 썼다.
포퓰리즘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또한 고유한 조직적 정체성을 지닌 정당이나 조직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지향이다. 포퓰리즘의 정신은 사회가 연대의 위기에 직면할 때 나타난다. 기성 정당들이 이러한 위기를 외면하거나 전통적인 형태의 연대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동안, 포퓰리즘 운동은 그러한 연대를 되찾는 일에 강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포퓰리즘의 정신은 사람들이 서로와 다시 연결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연결되며, 자신들보다 앞서 살아간 세대들과 다시 이어지도록 북돋운다. 포퓰리즘 운동은 오늘날 만연한 문화적 불안감에 대응하여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제공하고, 전통과 고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화 엘리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자신이 사는 고향과 공동체의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교육받지 못한 외국인 혐오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의 영역에서 포퓰리즘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요구를 나타낸다. 기술관료적·관리주의적 계층과 문화 엘리트들과 달리, 포퓰리스트들은 국민이 자신의 지혜와 도덕적 자원을 바탕으로 올바른 선택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본다.
포퓰리즘과 연관된 많은 반응과 태도들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정치 이전의 권위’를 찾으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정치 이전의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의미를 공동으로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흔히 전통적 가정, 공동체 생활, 그리고 종교를 긍정한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10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포퓰리즘 성향의 정당들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선거에서 약진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이 체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관심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정치운동에 대한 현실적인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르투갈의 정치운동 셰가(Chega, ‘이제 그만’이라는 뜻)를 예로 들어보자. 2019년 창당된 셰가는 이제 포르투갈의 제1야당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요구가 ‘리폼 UK’의 눈부신 성공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정치적 변방에 머물렀던 이 정당은 이제 여론조사에서 노동당과 박빙의 경쟁을 벌이며 보수당을 앞서고 있다. 미국에서 MAGA가 등장한 것 역시 도널드 트럼프 한 사람의 성취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식적인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운동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여 나타난 현상이었다.
포퓰리즘의 성공은 정치 기득권층이 거부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온,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정서들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주는 정당에 대한 대중적 요구에 기초하고 있다. 좌파의 저항운동과 달리, 국민적 포퓰리즘은 사회적·경제적 불의에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에 대한 요구’, 곧 사람들의 가치와 생활방식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요구에도 응답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 회복(cultural rescue)은 포퓰리즘 운동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의 포퓰리즘은 문화적 상실을 경험한 데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다. 포퓰리스트들은 대규모 이민, 다문화주의, 국가의 가치 절하, LGBTQ+의 이상에 대한 찬양, 그리고 전통적인 문화 규범을 위협하는 기타 정책들이 만들어낸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요구한다.
포퓰리즘적 상식에 대한 요구는 가까운 시일 안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자신들의 문화가 위협받고 있으며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포퓰리즘의 정신이 깊이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