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이유들 때문에 앙리 다니엘-롭스의 『암흑시대의 교회』를 읽으면서, 나는 제도적 위기의 순간에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도자들이 요구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거듭 절감해 왔다.
운동, 세력, 흐름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정수를 하나의 저작 세계 안에 응축해낼 수 있는 거대한 인물, 베네딕토 성인처럼 삶의 한 전체 양식을 창설할 수 있는 인물, 샤를마뉴처럼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인물, 교황 레오처럼 잔혹한 전쟁광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아, 그렇다. 바로 그것 말이다. 교황과 백악관 사이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이것을 서구 문화의 영혼을 둘러싼 일종의 시대적 투쟁으로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편에는 평화의 사람, 지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장엄하며 가장 기묘한 제도를 대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거니실 때 선포하셨던 바로 그 사랑의 메시지를 가져오는 이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교만과 복수심의 화신이 있으며, 이제는 실제로 신성을 모독하고 자신을 그리스도로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렀고, 그의 파괴적인 분노는 고대의 한 문명과 세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아마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긴 안목에서 보면, 이 충돌은 또 다른 무엇을 보여준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위대한 지도력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매혹적인 상(像)들을 부여받고 있다.
트럼프에게서 우리는 단 하나의 인격이 겉보기에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사실들을 뒤엎는 힘을 목격할 수 있다. 그는 먼저 공화당 내부의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지난 10년대 중반에는 거의 전능해 보였던 문화적 좌파를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또 그는 다른 어떤 정치인이었다면 침몰하고도 남았을 스캔들과 소송들을 거듭 떨쳐내 왔다. 이런 점에, 비록 어떤 유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점점 더 위대한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그의 결함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 결함들이 점점 더 그의 견고한 성취들마저 파괴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달 우리는 왜 교만이 가장 중대한 죄로 여겨지는지에 대한 극적인 교훈을 얻고 있다. 지난해 트럼프가 어떤 종류의 영적 위기를 겪고 있는 듯 보였다는 사실—“가능하다면 천국에 가고 싶다. 내가 잘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있다”—을 떠올리면 오싹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으로 내세우고 있다. 챗GPT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위대함이 아니다. 그것은 허영일 뿐이다.
한편 교황 레오에게서는, 교황직의 경이로움이 다시금 분명히 드러난다. 정치의 추함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위험의 순간들에는 비길 데 없는 힘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 그리스도교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래되었으나 늘 새로운” 것임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 그리고 그를 우러러보는 수십억의 우리에게 참으로 아버지다운 현존이다.
물론 성 요한 바오로 2세 이후로 이토록, 말하자면, ‘교황다워’ 보였던 교황은 없었다. 레오의 얼굴과 목소리에서는 기도하는 마음과, 최근 며칠 동안 그토록 뚜렷이 드러난 고요한 용기가 배어 나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분쟁도 축복하지 않으신다.” 정말 그러신가? “평화의 군주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한때 칼을 휘둘렀고 오늘날에는 폭탄을 떨어뜨리는 이들의 편에 결코 서지 않는다.” 결코? “군사 행동은 자유를 위한 공간도, 평화의 시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며, 평화는 오직 민족들 사이의 공존과 대화를 끈기 있게 증진하는 데서만 온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들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교황들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책임이 있다고 J.D. 밴스가 말할 때 그는 틀리지 않는다. (이번 경우에는 꽤 흥미롭게도, 구체적인 정책 사안에서는 교황이 옳고, 추상적인 신학적 문제에서는 부통령이 옳다.)
여기에 담긴 요점을 밝히기 위해 여호수아기, 복음서의 백인대장, 알프레드 대왕, 성왕 루도비코 9세, 성녀 잔 다르크, 레판토 해전, 빈 포위전, 나치 점령하의 유럽 해방, 그리고 중동 분쟁의 뒤얽히고 피비린내 나는 실타래들에 관한 숱한 사고실험들을 둘러싼 그 매혹적인 논쟁들을 다시 꺼내 들 필요는 없다.
교황청이 현재 신학적 엄밀성을 가장 먼저 기대할 곳은 아니라는 점만 지적하면 충분하다. 이는 교황 재위가 거의 1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여전히 바티칸 교리부를 맡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레오 교황 재위의 축복들과, 이 조용한 미국인의 분명한 선함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들려서는 안 된다. 교황은 우리에게 위대하고 역사를 바꾸는 교황 재위가 어떤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은 아직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그의 교황 재위가 어느 정도는 교황 성 대 레오가 훈족 아틸라의 이탈리아 유린을 막아낸 일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교회 신앙의 역사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로부터 벗어난 중대한 이단들과 충격적인 일탈들을 식별하고 이를 단죄했던 교황 레오를 특별히 연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용기와 신학적 정확성의 이 결합이야말로 레오 1세에게 “대(大)”라는 이름을 안겨 주었다. 교황들이 그것을 본받을 수 있게 되고, 전능해 보이는 정치가들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무(無)를 인정할 수 있게 될 때, 그때 역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