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4세의 기술과 인간 인격에 관한 회칙 『위대한 인류애』는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혁명에 대해 신중한 평가를 제시하며, 그 최첨단에 있는 인공지능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이 회칙의 포부는 절제되어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 우리는 인간과 너무도 흡사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기계들, 그리하여 우리 인간성의 미래를 묻게 만드는 기계들의 약속과 위험을 이제 막 파악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위대한 인류애』가 주로 강조하는 것은 정의에 관한 고찰이다. 바벨탑과 예루살렘 성벽에 관한 레오의 첫 묵상은 오늘날 통용되는 사회정의의 언어를 반향한다. 기술은 소수의 강력한 이들의 손에 남아 “배제와 조작과 불평등”을 낳게 될 것인가(바벨)? 아니면 우리는 그것들을 활용하여 연대, 형제애, 포용의 사회를 세울 것인가(예루살렘)?
이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근대 가톨릭 사회교리 전통의 가장 이른 정식화들에는 더 큰 관심사가 있었다. 레오 13세는 근대 산업경제가 제기한 도전들을 평가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는 분명 그 경제적 혜택의 공정한 분배를 지향했고, 억압의 위험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더 깊은 위협도 보았다. 전통 사회의 안정된 구조들, 곧 길드와 신심회, 연대와 상호 돌봄의 전통들이 해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 관계가 유동화된 세계 속에서 가정 자체도 새롭게 취약해졌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듯이, “단단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위대한 인류애』도 이와 비슷한 것을 암시한다. 문제는 인공지능이 고용에 관한 안정된 기대를 위태롭게 하고, 권력을 사기업들의 손에 집중시키며, 전례 없는 사회 통제의 도구를 제공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것은 피조물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을 지닌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침범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레오 14세는 직전 선임자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에 관한 우려를 인용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표현으로, 인간과 심지어 인간 본성까지 포함하여 현실의 모든 측면을 조작과 재구성의 원재료로 취급하는 관점을 뜻했다. 이 패러다임 아래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최적화되어야 할 하나의 프로젝트로 보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이 프로젝트 안으로 상당히 깊이 들어와 있다. 동성애 권리 운동은 우리의 몸이 도덕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도 우리가 선택한 쾌락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며, 개인의 행복을 최적화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몸이 물리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도 급진적 변형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보며, 역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 전체도 최적화하고 있다.
오늘날 임산부에 대한 진료에는 태아의 유전적 결함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많은 검사가 포함되며, 검사 결과 문제가 나타나면 여성들은 흔히 낙태를 권유받는다. 이러한 우생학적 프로젝트는 체외수정을 위한 배아 선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생의 말기에 이르면, 의사 조력 자살은 전망이 어두운 이들을 처리해 버린다. 실제로 우리는 여러 영역에서 인간을 최적화하려 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교만을 7대 죄악 가운데 첫째로 지목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상상력을 형성했다. 교만에 으뜸 자리를 부여하는 우리는, 『위대한 인류애』가 “강화된 인간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향한 충동을,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종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장악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시도로 해석하기 쉽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관료적 패러다임과 그 최적화를 향한 충동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확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 충동은 우리의 피조된 본성을 통제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피하고, 차단하고, 완화하려는 것이다. 야망은 더 커지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작아지고, 위험한 연루를 줄이며, 실망에 덜 취약해지고, 우리의 몸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기를 추구한다. 그것은 전진의 정신이 아니라 후퇴의 정신이다.
바로 여기에 인공지능의 가장 큰 위험이 있다. 레오 14세는 기계의 “지능”이 특정 영역에서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인간 지성과 같지 않다는 필요한 지적을 한다. “이른바 인공지능은 경험을 겪지 않고, 몸을 지니지 않으며,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관계를 통해 성숙하지 않으며, 사랑과 노동과 우정과 책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면으로부터 알지 못한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한다. 경험은 종종 예고 없이 찾아오며, 그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취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관계는 심각한 내적 상처를 낳을 수 있다. 사랑은 자주 고뇌를 가져온다. 노동은 영혼을 지치게 할 수 있고, 책임은 짐이 될 수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이러한 인간적 특성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몸도 없고 영혼도 없는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성의 많은 본질적 차원들을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에 더욱 유혹적이다. 그것은 현재 “동반자”들을 제공한다. 그들은 언제나 공감적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신뢰할 수 있다. 자주 산만하고 무관심하며, 심지어 이중적인 인간들과는 달리 말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함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더 진보된 시뮬레이션된 경험과 관계, 나아가 “충분히 실제 같은” 몸의 구현까지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가상 친구를 가질 수 있고, 그들을 위해 결코 희생할 필요도 없다. 또는 얄팍한 만족을 제공하면서도 충분히 비현실적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디지털 연인을 가질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위험 없는 모험, 이탈 없는 여행, 결과 없는 공격성을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길로 나아가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를 사회적 연결과 쓰라린 이념 갈등이 이루어지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비육체적 세계로 초대한다. X와 같은 플랫폼은 공격적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싸우는 이들이 자신들의 타격이 낳는 결과를 알지 못하게 해 준다.
만일 그 결과를 본다면 그들의 양심이 불편해질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많은 설명에 따르면, 성장하는 세대에게 디지털 포르노는 이제 육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대체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 온라인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은 최고의 직업적 야망이다.
『위대한 인류애』는 인간에게 비인간화되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욕당하거나, 노예화되거나, 학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레오 14세가 오늘날의 디지털 혁명에 대해 계속 성찰해 나간다면, 온건하지만 널리 퍼지는 비인간화의 매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것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대신하는 수많은 대체물들로 완화될 때 더욱 그렇다.
우상숭배가 바로 이러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거짓이면서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을 알고 공경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흐릿하게나마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실제 같은 방식으로 예배를 시뮬레이션한다. 내가 보기에 가장 심오한 위협을 이루는 것은 바로 시뮬레이션의 유혹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성에 요구를 부과할 만큼 충분히 실제적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여전히 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상상하게 할 만큼 충분히 실제처럼 보인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