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마커스 코빈의 신간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기 위하여》(To Arrive Where We Started)는 전통적 지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시한다. 그는 복잡한 이론뿐 아니라 릴케, 플라톤, 조너선 리어, 벨 훅스처럼 서로 매우 다른 사상가들의 통찰을 끌어와, 우리가 우정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세계에 깊이 몸담는 삶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밝힌다.
이 책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단순한 일들을 실천하기” 또는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지 기억하기”라는 부제가 붙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좋은 삶의 전제 조건들이 오늘날에는 잊히고 말았다. 기술관료적이고 소외된 문명의 주민인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와 있다.
한 문명이 자신의 뿌리뿐 아니라 선함과 선의, 다정함과 이웃 사랑에 대한 보편적 믿음, 민중적인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에서 단절될 때, 사회적 해체와 허무주의와 자살은 가까이 다가온다.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진에 속한 철학자인 코빈은 암울한 진단을 내린다. 우리가 자신의 동물성과 육체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기적인 공동체 안으로 다시 통합되지 않으며, 계몽주의가 제시한 생기 없는 인간상, 곧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상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자연과 에로스와 하느님으로부터 영구히 분리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어디에서나 스크린에 사슬로 묶여 있다.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기 위하여》는 처방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실을 묘사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둔다. 궤도를 벗어나 폭주하는 문명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밝혀내는 일은 한 사람의 저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과제이다. 코빈은 원초적인 감각과 실천이 가장 현실적으로 회복될 수 있는 영역들을 그려 보이는 데 만족한다.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가 직접 상상해야 한다.
코빈의 책은 지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작지만 누적되며 심지어 증폭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 고독한 독자를 겨냥한다. 이 책은 무기를 들라는 격문이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오순절교회에서 성장하고 한때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현재는 성공회 수도원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코빈은 서문에서 자신이 철학적으로 끊임없는 “영적 실향 상태”에 대한 감각에서 동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기 위하여》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통 신앙인들만을 위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실존적 문제와 씨름하는 이들과 구도자들을 위한 것이다.
코빈은 낭만주의적 예언자이다. 그의 어조는 온화하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지만, 그는 현대세계에 대한 준엄한 비판자이다. 모든 참된 예언자가 그러하듯, 그가 제시하는 미래의 모습은 그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볼 눈과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 알고리즘과 스크린에 기반한 우리의 생활방식이 더 큰 파국을 불러올 것인지는 ‘과연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이다.
코빈은 펜타닐로 인한 사망, 조력자살, 무차별 총격 사건을 급속히 병들어 가는 문화의 증상으로 지목하면서, 우리의 “승자독식 사회”가 “탈진의 징후를 보이고” 있으며 “붕괴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코빈의 핵심 주장은 인간의 몸이 여러 하위 체계로 이루어진 복잡계이면서 더 큰 생태계 안에서 존속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상위의 체계들로부터 결코 독립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언제나 상호의존의 상태 안에 존재한다.
코빈은 이러한 인간학이 지닌 함의를 발전시켜, 우정과 성, 시장과 자연 안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상호의존적이고 함께 진화하며 서로를 조절하는 관계보다는, 적대적이고 거래적인 관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세계는 사람을 군중 속에서 외롭게 만든다. 한 미국인과 다른 미국인의 관계는 친구나 이웃의 관계라기보다 죄수와 교도관의 관계에 더 가깝다.
현대인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위대한 신비’라고 불렀고 플라톤이 ‘에로스’라고 불렀던 것에 참여할 능력을 잃었다. 우리는 “상호 인정의 에토스”를 지닌 하나의 공유된 세계에 살기보다 저마다 고립된 자기 세계 안에 거주한다. 우리는 이미지와 의견과 페르소나들, 곧 친구와 연인, 가족과 이웃의 시뮬라크르에 포위되어 있지만, 정작 대화와 진정한 교류, 함께 사랑하는 것들이 주는 기쁨에는 굶주려 있다.
내가 드래프트킹스 계정을 확인해 뉴욕 닉스에 건 내기가 적중한 것을 보거나, 직장에서 상여금을 받거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로서 충분한 클릭 수를 올려 수익금을 받는다면, 도파민이 솟구치는 느낌과 함께 적어도 잠시나마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는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고립된 채 돈을 극대화하는 하나의 단위일 뿐이다.
코빈이 “소유주의(ownerism)”라고 부르는 것, 곧 소유와 소비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코빈은 대화와 깊은 우정, 세상에 대한 참여를 통해 개인이 여전히 자신을 세계에 다시 열 수 있다고 믿는다.
코빈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의 성찰을 끌어와, 우리 모두가 죄인이면서 동시에 무죄하다고 말한다. 한 주체가 자신에게 세계가 필요하고, 고향이 필요하며, 아름다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무언가가 달라진다. 소외에 수반되는 수치심, 곧 진정한 지침이나 규칙, 전통이 없는 삶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수많은 후회는 우리가 서로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재발견하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기 위하여》의 메시지는 이상주의적이다. 현대의 소외된 주체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자신의 수치심을 인정하고, 주위에 있는 사랑을 향해 자신을 열기만 하면, 날마다 더욱더 많은 사랑이 자신에게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만들어 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격리가 무너지면서, 대지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욱 생생한 존재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코빈의 짧은 책은 바로 그 ‘말하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입은 우리를 계몽주의가 제시한 자율적 주체라는 거짓 인간학에서 벗어나게 하고, 가족과 공동체와 자연이라는 더 큰 영역 안에 뿌리내린 통합된 자아의 모습으로 이끄는 데 있다.
코빈은 이렇게 암시한다. 틀을 바꾸면, 그림도 바뀌기 시작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