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흉한 거리가 너무도 많다. 나는 자주 걷고 달린다. 그러다 보면 쓰레기와, 길가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작거나 때로는 제법 큰 먼지와 흙더미, 깨진 포장도로와 여기저기 흩어진 잡초가 눈에 들어온다. 가끔 신발끈을 묶으려고 멈추거나, 무언가를 떨어뜨려 그것을 찾다 보면 이 잔해 속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안의 작은 조각들은 흥미롭다. 우리 사회와 세계와 삶을 보여 주는 자그마한 표지들이 한데 쓸려 모여 있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포장지나 사탕 상자의 조각, 플라스틱 버번 위스키 병뚜껑, 담배꽁초와 전자담배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작은 딱정벌레나 거미, 부러진 나뭇가지 끝, 나뭇잎의 가장자리, 꽃잎 몇 장도 있다. 거리의 오물을 헤집는 것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톱니바퀴를 찾아내는 일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를 이렇게 해체하는 일은 현대의 한 가지 명령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의 표현을 빌리면, 용기 있는 도덕 비평가에게는 세계의 거리들을 ‘탈신비화’함으로써 불의를 강요하는 그 이면의 경제적·정치적 지렛대를 폭로하라는 요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좌파만의 소명이 아니다. 프로이트 이후의 온갖 심리치료 전문가들도 이 소명을 떠맡았다. 놀이든 노동이든, 식당이든 식료품점이든, 이른바 ‘일상’은 갈등과 폭력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뒤틀린 영적 영역이라고 우리는 배운다. 르페브르와 미셸 드 세르토 같은 신학자 겸 사회학자들은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억압적 질병의 증거이자 수단으로 묘사하는 데 거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우리를 쉽게 파멸시킬 수 있다. 그것은 절망이 인간의 해체로 퇴행하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낸다. 작은 조각과 파편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설계 사업과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설계만이 추함과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참된 척도이다.
그러나 그 범위가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이를테면 한 도시의 거리처럼 의미라는 거대한 화폭 아래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를 ‘미세한 입자’의 음울함보다 더 멀리 데려가지 못한다. ‘미세한 입자’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시대적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언어적 버릇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20세기 후반의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조르주 페렉(1936~1982)을 다시 읽으면서 이 진리를 무겁게 느꼈다. 페렉은 참으로 위대한 작가였다. 영어권 독자 대부분은 그를 알지 못한다. 다만 몇몇 사람은 작가가 작품 전체에서 알파벳 ‘e’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1969년의 기묘한 소설 《실종》(La Disparition, 영어판 제목은 《A Void》)을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페렉은 처음에 ‘울리포’OuLiPo라고 알려진 느슨한 작가 집단에 속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언어적·주제적·구조적 제약을 스스로 부과한 상태에서 작품을 쓰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여러 제약이 함께 요구하는 바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특정 글자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소설이나, 단어가 나올 때마다 글자 수가 하나씩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문장을 생각해 보라.
페렉이 도덕적 집착을 가지고 사용했던 보다 주제적이고 지시적인 제약 가운데 하나는 장소나 행동 또는 일련의 사건을 이루는 가장 작은 세부 사항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 《인생 사용법》(1978)은 한 아파트 건물의 서로 다른 방들에서 같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글쓰기는 도시 거리의 잔해를 파헤치는 일을 공동생활 전체로 확장하는 금욕적 수련을 반영한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많은 책을 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동생활은 보통은 주목받지 못하는 무수한 세부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끝이 없다. 그는 종종 독자들에게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일상적인 형태의 작가적 기술을 익히라고 권유한다.
그는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그 기원마저 잊어버린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천 가지 다른 것들과 함께 존재했고”, 우리를 “빚어 온” 것들에 대한 ‘경이’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의자의 다리,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 싱크대 안에 놓인 플라스틱 조각의 얼룩덜룩한 가장자리, 그리고 싱크대 자체와 같은 사물의 극히 작은 세부 사항을 묘사하는 것은 세계를 정적으로 제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탐구하고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다. 그는 〈무엇에 접근할 것인가?〉(1973)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벽돌, 콘크리트, 유리, 식사 예절, 식기, 도구, 시간을 보내는 방식, 우리의 리듬이다. 우리를 더 이상 영원히 놀라게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질문해야 한다. 당신의 거리를 묘사하라. 다른 거리를 묘사하라. 서로 비교하라. 주머니 속 물건과 가방 속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라... 당신의 찻숟가락에 질문하라.”
페렉의 문학적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와 강제수용소에서 부모가 사라진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쓴다. 내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그림자 사이의 한 그림자였으며, 그들의 몸 가까이에 있던 한 몸이었기 때문에 쓴다. 나는 그들이 내 안에 지워지지 않는 표지와 이미 말해진 것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쓴다.”
그 자신의 삶은 파괴된 세계에서 살아남아 증류된 잔여물이었다. 그러므로 일상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남겨지고 ‘구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로 조립된 의미의 일관성으로부터 억지로 뜯겨 나온 파편과 조각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페렉은 이러한 글쓰기의 대상을 ‘하위일상적인 것’infra-ordinary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리가 지상 순례 중에 마주치는 평범한 장소들 아래에 놓여 있는 것, 곧 생존의 파편들을 담고 있는 자루이다. 하위일상적인 것은 타락한 상태 아래에서도 세계가 순수하고 완강하게 지속될 때 취하는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하위일상적인 것이 매우 두렵다.
그와 대조적으로, 일관성은 하느님의 명령이다.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이다. 작은 것들과 조각과 파편들은 어떤 하나의 것을 이룬다. 그것은 작동하고 움직이며, 우리를 나르고 모아들이는 어떤 것이다. 최근 우리는 인간의 장이 수조 개의 미생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혹된다. 그러나 이 미생물군과 그 구성원들을 친구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셀 수 없는 바닷가의 모래나 우리 머리카락은—우리가 각각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나하나를 아신다—우리를 압도하는 죄나 이해할 수 없는 은총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시편 40,13; 139,18; 루카 12,7).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의 들끓는 밑바닥이 지닌 무한한 범위는 하위일상적인 것을 우리가 기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밀어낸다.
일관성은 하느님 창조의 형식이므로 우리의 존재를 보호한다. 거리는 길이지, 잔해가 늘어선 선이 아니다. 옷은 몸을 덮는 것이지, 천 조각과 누더기를 이어 붙인 것이 아니다. 식사는 사랑의 원 안에서 우리의 영양 섭취를 모으고 질서 짓는 것이지, 열량과 단백질 섭취를 불연속적으로 표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음악은 정신과 영혼을 집중시키고 통합하는 것이지, 소리를 지각의 파편들로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일련의 문화적 주장처럼 들린다면, 실제로 그러하다. 일관성은 사회적·정치적 덕목이다. 거기에서 수많은 헌신과 기쁨과 만족이 흘러나오며, 그것은 불안해하는 이들과 상처 입은 이들에게 위로의 향유가 된다.
거리가 흉하다면 청소하라. 쓸고, 갈라진 곳을 고치고, 나무를 심어라. 그 밑을 파헤치거나 조각조각 뜯어내지 마라. 학교, 제도, 들판, 노래, 직업, 가정에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는 하나로 결속된다. 하느님만이 이해하시는 것을 해체하려는 자들은 물러가라.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심지어 하위일상적인 것까지도 드러내어 아름다운 것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몇 집단에서 널리 유행했다. 주로 집에서 꼼짝 못 하고 다림질을 하는 여성들에게 호소하는 영성 시장의 한 구석에서 그러했다.
나의 어머니는 점점 깊어지는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여러 해 동안 대가족을 위해 속옷과 셔츠와 침대 시트를 다렸음에도 다림질을 몹시 싫어했다. 어머니는 캐슬린 노리스의 글에서 도움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렉의 글은 분명 어머니에게 불행한 자기 존재의 따분하고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만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대한 그림이지, 안료와 붓털의 목록이나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손의 작은 근육들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페렉에게 세부 사항은 또한 ‘남아 있는 모든 것’이다. 그것은 ‘상 아래 떨어진 부스러기’이다. 여기에서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마르코 7,28). 우리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겨우 이것입니까? 부스러기뿐입니까?” 하느님 없이 일상은 죽음의 골짜기가 된다. 모든 것이 시들고 해체되는 시선 앞에 노출된다.
그러나 하느님과 결합될 때, ‘겨우 이것’은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믿음’이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일상’을 찬미할 때 흔히 놓치는, 초월을 향한 가능성이 하위일상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하느님께서는 자갈들을 영광스러운 현현으로 바꾸시고 그것들에게 목소리를 주신다(루카 19,40).
그동안 우리는 견디어 낸다. 인내하고, 하느님의 목적이 장엄하게 하나로 모이는 것을 바라보며 굳건히 서 있는다. 하위일상적인 것은 어쩌면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로마 8,22). 그러나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설계와 그분의 예술성, 그분의 일관된 사랑이 위대하게 드러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인공물에서 가장 위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이 이를 보신다. 우리의 임무는 다만 세상의 페렉들과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분명히 밝혀 주실 때까지 만물을 하나로 붙들어 두는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