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2015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을 때, 나는 언론계에서 일한 지 약 2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밟는 동시에 언론인으로서 경력을 쌓고 있었다. 지금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 무렵에는 얼마 전 The Week라는 매체에서 뉴스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곳의 편집자들중 논평 팀은 이념적으로 다양한 반면, 뉴스 팀은 20대 민주당 지지자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문화적·종교적 성향도 그러한 정치적 성향에서 예상할 수 있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편집자들은 팀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젊은 필자를 수소문했고, 나를 찾아냈다.
The Week는 나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나를 채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신앙도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나는 편집·집필진 가운데 겉으로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유일한 복음주의자였고, 자연스럽게 복음주의에 관한 기사들이 내게 배정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기사들을 먼저 제안하곤 했다. 내가 이 주제를 자신 있게 다룰 수 있고, 다른 필자들이 쉽게 얻기 어려운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트럼프가 등장했다. 언론계에 있는 많은 고학력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도덕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그랬다.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생각을 한 적은 없었고―나중의 조 바이든이나 카멀라 해리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트럼프가 복음주의 유권자들에게 서툴게 영합하는 모습을 보며 실망했고, 그것이 실제로 먹혀들었을 때에는 더욱 크게 실망했다.
그해부터 이후 여러 해 동안 나는 트럼프와 복음주의자들에 관해 자주 글을 썼다. 대중의 인식 속에서 어떻게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그’ 트럼프와 그토록 강하게 연결되었는지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도 실망하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한 데에는 변호할 만하고 이해할 만한 이유들이 있다는 현실과 그 실망감을 함께 받아들이게 되기는 했지만, 이 글은 내가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도널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미국의 공론장에서 복음주의가 차지하는 위치를 둘러싼 더 큰 문제다. 복음주의를 향한 무자비하고 부정확한 비판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이제는 복음주의 전통 전체를 트럼프 지지층 가운데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보이는 모습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등치 때문에 광적인 수준으로까지 치달았다는 문제다.
물론 우리가 솔직하고 심지어 가혹한 비판에서 면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주류 논평가들, 특히 세속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는 이른바 ‘탈복음주의자들(exvangelicals)’ 가운데 많은 이들이 사실을 터무니없이 빗나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의 비난은 서로 모순되며 관대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인 무지나 조작, 혹은 부당함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이 복음주의의 악의나 위협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여러 문화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된 것이거나,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에게 공통된 것이거나, 혹은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 전체에게 공통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비판자들이 선의의 쇄신 요구라고 내세우는 것 가운데 상당수가 실제로는 복음주의를 이미 실패한 운동, 구제할 길이 없고 부끄러우며 도덕적·영적 신뢰성을 완전히 상실한 운동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을 집을 고치러 온 리모델링 팀이라고 소개한 뒤, 결국 집 전체를 철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비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록적인 수준의 그리스도교적 종교성이 미국 사회에 존재했던 시대로―다소 과장되게―기억되는 1950년대에도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경시당하고, 왜곡되어 묘사된다”고 느꼈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25년에는 언론인 H. L. 멩켄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구나 알다시피 복음주의 그리스도교는 증오 위에 세워져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 말은 한 저명한 복음주의자를 “똥더미로 돌아온 농부”라고 묘사하면서 나온 것이었다. 멩켄은 그 사람이 “유치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신학은 “모든 학문, 모든 인간의 존엄성, 모든 아름다움, 모든 고상하고 숭고한 것들을 향한 거의 병리적인 증오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2015년 무렵부터 분명히 격화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트럼프의 부상과 탈복음주의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 10년이었다. 여기에는 복음주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거나 떠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 현상도 포함된다. 이와 동시에 성과 젠더를 둘러싼 미국 사회의 규범과 법률이 급속하게 변화했고, 유명 복음주의 인사들과 관련된 여러 추문이 연달아 터졌으며, 종교 일반에 대한 무지도 점점 심화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별나고, 지나치게 튀고, 예수에 관한 온갖 이야기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복음주의를 둘러싼 담론은 정말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같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완전히 타락했다거나, 트럼프가 저지르는 모든 악에 대해 복음주의자 개개인이 책임이 있다는 식의 광범위하고 무자비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없는 단정적 주장을 내놓는 것을 보는 일이 별로 놀랍지도 않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복음주의자들이 널리 논의되는 방식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정확히 언제부터 알아차리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자는 언제나 어떤 이야기를 가장 먼저 포착하고 싶어 하지만, 이 문제를 내가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내게는 트럼프와 복음주의자들의 관계 자체가 훨씬 더 새롭고 긴급한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경이 되자 나는 복음주의자들과 트럼프 사이의 연대를 비판하는 동시에, 진보 성향 탈복음주의자들의 이중 잣대를 꼬집기 시작했다.
The Week에 쓴 한 기사에서 나는 한 탈복음주의자가 내놓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반박했다. 즉 “낙태와 동성 간 관계는 정치에서 다루기에 부적절한 주제이며, 복음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에 관해 공개적으로 침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식 신정정치’를 만들어내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의 장르 전체에 대해 내가 의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최초의 순간은 2022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역사학자 크리스틴 코브스 두 메즈가 2020년에 출간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예수와 존 웨인』을 읽었다.
그 책의 부제가 요약하듯이, 책의 주장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신앙을 타락시키고 한 국가를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의 대부분은 역사적 서술에 할애되어 있다.
나는 『예수와 존 웨인』을 다 읽고 난 뒤,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알 수 없는 두 가지 인상을 동시에 받았다.
한편으로,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범위와 여러 서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범위에서 보자면, 그 책의 역사 연구는 세밀하고 충실했다. 글은 설득력 있게 쓰였고, 두 메즈가 소개한 여러 사건은 실제로 그녀가 말한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두 메즈가 묘사하는 그 타락한 운동을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는, 적어도 제시된 범위 안에서는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 증거에서 그러한 결론이 따라나오는가?
내가 알고 지내는 복음주의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타락시키거나 우리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승자가 있을 수 없는 오늘날의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미국인들보다 더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트럼프에게 투표한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내가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심각한 견해 차이를 지닌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여러분이 매주 건전한 복음주의 교회의 신자석에 앉아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면, 아마 여러분도 이와 똑같은 괴리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개신교인으로서 우리는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열려 있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요청에 응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를 광범위하게 ‘괴물화’하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매주 주일에 목격하는 평범한 신자들의 충실한 신앙생활과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수많은 반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정도 규모를 가진 모든 운동이 그렇듯, 복음주의 안에도 괴짜들과 주변부의 극단적인 인물들이 존재한다.
대형 교회를 거느린 사람들―혹은 적어도 덥수룩한 수염과 인기 있는 대형 팟캐스트를 가진 사람들―가운데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신념과 행동을 보이는 유명 인사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미국 복음주의를 이루고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친절하고 신앙에 충실하며, 정치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도 평범한 수준―다시 말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자신의 교회나 자신의 정체성이 정치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회도, 자신의 정체성도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변화하고 극도로 양극화되어 있으며, 어느 쪽도 좋은 선택지가 되지 못하는 양당제 정치 체제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현실에 적용하려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이 언제나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멸시받을 이유가 없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