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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캡쳐 |
북한이 ‘타도제국주의동맹’, 이른바 ‘ㅌㄷ’ 결성 100년을 내세워 또다시 김일성 우상화에 나섰다. 당과 국가의 핵심 간부들이 조선혁명박물관에 모여 지도자의 업적을 찬양하고 충성을 다짐했다. 주민의 삶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권력의 신화를 되새기는 데 줄을 선 것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의 100년’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역사를 독점하고 주민의 의식을 지배해 온 거짓과 기만의 구조다.
북한은 김일성이 열네 살이던 1926년 ‘ㅌㄷ’을 결성했으며, 여기서 노동당과 북한 혁명의 뿌리가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처럼 중대한 사건이라는 이야기가 언제부터 기록에 등장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ㅌㄷ’ 서사가 1968년 출판된 김일성 전기에 비로소 등장하고, 이후 내용이 확대돼 북한 현대사의 출발점으로까지 격상됐다고 지적한다. 사건이 있었다는 때로부터 수십 년 뒤에 나타나 점점 위대해지는 이야기를, 검증 없이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역사는 사료와 검증으로 설득해야 한다. 박물관의 크기나 초상화의 수, 간부들의 충성 맹세가 사실을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 북한 당국은 ‘ㅌㄷ’을 김일성의 비범함을 증명하는 출발점으로 세우고, 그 위에 수령의 무오류성과 후계 권력의 정당성을 쌓아 올렸다. 검증돼야 할 과거가 의심해서는 안 되는 신화로 바뀐 것이다.
이 신화의 가장 큰 해악은 주민에게서 판단할 권리를 빼앗는 데 있다. 모든 해방과 승리는 수령의 은혜가 되고, 실패와 고통의 책임은 외부의 적이나 충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주민은 권력의 성과를 평가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권력에 감사하고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밀려난다. 수령을 신성화한 역사는 오늘의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다.
‘타도제국주의’라는 이름과 세습 통치의 현실 사이에는 더욱 참담한 모순이 있다. 외부의 지배를 물리쳤다면서 내부에서는 한 가문의 권력을 대대로 떠받들게 한다. 민족의 자주를 외치면서 주민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삶을 선택할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다. 해방을 명분으로 세운 권력이 주민의 정신까지 소유하려 한다면, 그 해방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최근 출간된 ‘남북 혁명가의 대화’의 공동저자인 김성일의 활동 취지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의 혁명조직원이었던 김성일은 주민들의 의식 속에 박힌 김일성의 거짓 신화를 깨뜨리려 했다. 이는 단순히 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려는 일이 아니었다. 수령의 말을 진실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 주민들이 스스로 의심하고 판단하게 하려는 문제 제기였다.
수령도 오류와 책임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 당이 가르치는 역사도 검증할 수 있다는 자각은 우상화 체제의 토대를 흔든다. 주민들이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숙명으로 여기지 않고 통치의 책임을 묻기 시작한다면, 충성의 언어로 덮어 온 모순도 드러날 수밖에 없다. 김성일의 시도를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다. 주민의 의식에서 신화를 걷어 내는 일은 자유를 향한 출발이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이 진실을 자신한다면 자료를 공개하고 반론을 허용하면 된다. 김일성의 행적을 자유롭게 연구하고, 교과서의 서술을 비판하고, 박물관의 설명에 질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질문을 금지한 채 강요하는 찬양에는 역사적 권위가 없다. 권력이 지켜야 할 것은 지도자의 신성함이 아니라 주민의 존엄과 권리다.
100년이라는 숫자는 거짓을 진실로 바꾸지 못한다. 여러 세대가 같은 이야기를 외웠다고 해서 조작과 과장이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북한에 필요한 것은 더 거대한 우상도, 더 요란한 기념식도 아니다. 주민이 강요된 신화에서 벗어나 자기 눈으로 역사를 읽고 자기 목소리로 권력을 평가할 자유다.
김성일이 깨뜨리려 했던 거짓 신화의 벽을 이제 진실의 질문으로 허물어야 한다. 거짓과 기만의 100년에 종지부를 찍는 길은 분명하다. 수령에게 빼앗긴 역사를 주민에게 돌려주고, 복종을 강요당한 자리에 자유로운 인간을 세우는 것이다.
<論 說 委 員 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