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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499] 무슬림 이민에 대한 이슬람식 해법 - ①

2026-10-22 07:30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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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행킨스 James Hankins is professor of humanities at the Hamilton School for Classical and Civic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Florida. 플로리다대학교 해밀턴 고전·시민교육대학 인문학 교수


현대 미국은 젊음의 제단 앞에서 경배하며, 여론조사와 시장조사를 통해 젊은이들의 가장 최근의, 가장 가벼운 변덕까지 열심히 추적한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젊음에 몰두하는 모습은 과거의 사회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과거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노인들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했다. 한때 노인들의 조언을 귀하게 여겼던 것은 그들이 오랜 인생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가 역사에 가치를 부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헤로도토스 시대 이래 역사 공부는 개인의 타고난 기억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장려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자기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대에 빠져들 때, 연륜 깊은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차분한 태도를 갖추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가 전례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위기들이 과거에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 결과가 좋았든 나빴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위기 가운데 하나는 대규모 이주 시대의 사회적 결속에 관한 것이다. 이주민 가운데 무슬림이 대거 포함되어 있을 때 이러한 도전은 특히 심각해진다. 이슬람은 자신의 종교적 세계관에 맞추어 공적 생활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에 관해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자신감 넘치는 선교 종교이다. 또한 시민 생활을 규율하는 상세하고 포괄적인 법체계를 동반한다. 서구 국가에서 무슬림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면, 그들의 종교 체계는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깊이 행사해 온 영향력에 맞서는 경쟁자로 등장한다.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우리 문명의 유다·그리스도교적 토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전망을 우려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 신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의 기본 원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처럼 근본적인 성격의 사회·문화적 변화가 혼란과 양극화를 일으키며, 잠재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아볼 것이다. 따라서 급진화되거나, 서구는 파멸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패배주의에 빠지기가 너무나 쉽다.

역사는 우리에게 기력을 앗아가는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조언한다. 역사는 오늘날의 막다른 상황에서 벗어날 다른 출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무지한 군대들이 밤중에 충돌하는 현재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우리를 끌어내어, 다른 시대와 장소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 준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확장함으로써 우리의 실천적 지혜를 키워 준다. 새로운 형태로 응용하고 재조합할 수 있는 요소들이 풍부하게 쌓인 기억은 상상력의 원동력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역사를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다. 특히 존 애덤스, 존 디킨슨, 제임스 매디슨, 토머스 제퍼슨이 그러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자신들이 그토록 자주 찬사를 보냈던 “저명한 몽테스키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스승이었다. 그들이 역사를 읽은 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있었으며, 과거의 어떤 제도들이 성공하고 어떤 제도들이 실패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이라면 그들의 접근법을 ‘응용 역사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미국 헌법을 설계하면서 역사를 활용하여 과거의 제도를 상황에 맞게 차용하는 능력을 키웠다. 실제로 양원제에서 권력분립, 상원의 외교 업무 관여에 이르기까지 미국 헌법에는 서구의 공화정 전통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의 성공과 실패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이탈리아의 공화정 전통, 특히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전통을 비롯해 네덜란드와 영국 공화정에서도 배웠다. 건국자들이 창안한 정부 형태는 자유의 폭과 평범한 시민들의 분별력에 대한 신뢰에서 전례가 없었지만, 서구 공화정 전통의 여러 요소를 가려내어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결과였다.

많은 논평가는 건국자들의 지혜가 사라졌으며 오늘날 정치 무대에는 그와 같은 천재들이 없다고 한탄한다. 나는 불평하는 대신 건국자들의 모범을 따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 역시 무슬림의 대규모 이주가 제기하는 위협의 해결책을 역사에서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구의 역사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모든 성공적인 국가의 역사로 눈을 돌릴 수 있다.

때로는 뜻밖의 곳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미국이 말레이시아의 1957년 메르데카 헌법에 명문화된 종교 정책을 자국의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려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얼핏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들릴 것임을 안다. 어쨌든 말레이시아는 무슬림 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주기 바란다.

먼저 역사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은 독립선언문의 핵심 주장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에게서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았고, 그 가운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가 있다.” 이 기념의 해에 온갖 논평가는 오늘날의 불만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독립선언문의 위대한 인간 평등 원칙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이 제시하는 특정한 해결책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나 민주사회주의자로 여기는 일부 미국인은 인간 평등의 원칙에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오려는 모든 사람이 우리 땅에서 환영받을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건국의 위대한 평등 원칙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살면서 그 혜택을 누리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출신 지역이 어디든, 고국의 종교와 문화적 관행이 무엇이든, 개인으로서 우리의 공동생활에 기여할 가능성이 어떠하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줄을 서라”가 그들의 유일한 선별 원칙인 듯하며, 때로는 그마저도 아니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최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민에 대해 이처럼 급진적인 평등주의적 관점을 취한 사회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이민자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온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최소 2년간 미국에 거주한 품행이 바른 “자유로운 백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한 1790년 귀화법 이래,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진 에마 래저러스의 유명한 시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전면적인 문호 개방 정책을 시행한 적이 없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선별은 언제나 미국 귀화법의 일부였다. 이민자의 종교 문제는 늘 논쟁거리였다. 실제로 최근에 이르기 전까지 이민 정책을 둘러싸고 가장 격렬한 감정적 논쟁이 벌어진 때는 19세기였다. 당시 ‘노낫싱당’, 곧 미국당은 가톨릭 신자들의 이민과 그들이 행사한다고 여겨진 영향력에 반대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 논쟁의 결과가 시사하듯, 미국의 역사적 경험은 종교적 신앙에 근거한 이민 제한 정책에 도덕적으로 정당한 본보기를 제공하지 못한다. 가톨릭 신자들과 유대인들이 이 문제에 특히 민감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은 수정헌법 제1조에 명시되어 있으며, 미국이 누리는 자유의 영광스러운 성취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은 18세기에 국교국가를 거부한 최초의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내가 최근 펴낸 『황금의 실: 서구 전통의 역사』 제1권에서 길게 논의한 국가 유형으로,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국교로 인정하는 국가이다. 그 국경 안의 다른 종교들에는 정도가 서로 다른 관용이 허용된다. 때로는 적극적인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박해가 격렬하게 일어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대부분의 시대에는 종교적 순수성보다 사회적 평화가 더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국교는 사회를 결속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며, 국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낮은 지위를 갖는다.

예를 들어 법적 보호를 덜 받거나, 공개적인 종교 실천에 제한을 받거나, 공직 진출과 교육 기회에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불이익 가운데 가장 익숙한 사례는 아마도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1829년 가톨릭 해방법이 제정될 때까지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부과된 제약일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는 유쾌한 기억이 아니다. 이는 서구의 역사 자체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의 확장을 얻기 어려울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그 필요성은 점점 더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공공 당국과 경찰이 애국적인 영국인들에 맞서 정기적으로 소수 무슬림 편을 드는 영국의 현재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미국에서도 비슷한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할 것이다. 자기 나라의 유산에 대한 이러한 뒤틀린 적대감은 일부 지역에서 잉글랜드 국기와 그 밖의 국민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의 게양을 억제하고, 심지어 금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유럽 대륙에서는 2015년 이후 시리아와 다른 지역에서 무슬림이 대거 이주한 뒤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새로운 형태의 테러와 성폭력이 뒤따랐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그 사실을 알아보려 한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그리고 유럽에서는 그렇게 될 것 같아 나는 우려하지만, 사회적 긴장과 정치적 불안정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려는 이슬람의 공개적 실천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 약화되는 것을 막을 기회가 아직 있다. 급진 이슬람의 커지는 영향력에 대응할 조치를 취해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 역시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폭력 사건을 수없이 겪었다. 특히 미네소타주의 소말리아계 공동체에서는 우리의 법과 관습을 경멸하고, 공공의 관대함을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례를 다수 볼 수 있다. 진보 좌파 가운데에는 범죄자들을 백인 다수에게 억압받는 사람들로 분류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범죄 행위를 변호하고 심지어 묵인하려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탈자유주의 진영의 일부는 국교국가의 부활, 또는 부분적 부활과 비슷한 것을 주장해 왔으며, 예상대로 고전적 자유주의 우파의 분노를 샀다. 이들은 그들을 “권위주의적”, “반혁명적”, 심지어 “전체주의적”이라고 규정한다. “반혁명적”이라는 딱지는 역사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전형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얕은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다수의 종교 문화를 멸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투쟁적인 종교 운동으로부터 그 문화를 보호하는 도덕적으로 정당한 본보기를 찾기 위해, 수백 년 전의 국교국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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