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양성애자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사를 논란 속에 게재했다가 철회하고, 다시 게재했다. 해고와 사직이 잇따라 직원의 절반이 줄어든 가운데 벌어진 이 일은 이 잡지의 언론관과 편집 방침의 현명함, 그리고 미래에 관해 정당한 의문을 숱하게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잡지를 구독하지 않고 읽은 적도 드물기 때문에, 이번 파문에 개인적인 이해관계는 없다. 다만 논란이 불거진 뒤의 무책임한 대응 전략을 보면, 언론의 폭풍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확인되는 듯하다. 고인이 된 에든버러 공작이 즐겨 인용하던 격언을 빌려 표현하자면, “절대 사과하지 말고, 절대 해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혼란은 중요하지만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 질문도 불러일으킨다. 복음주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어느 한 복음주의 단체의 잘못을 복음주의 전체의 잘못으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에게 복음주의는 분명히 매를 대신 맞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는 발언의 발판을 제공한다. 공식적인 지도부가 없으므로, 소셜 미디어 계정만 있으면 누구든 복음주의를 자처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주의는 하나의 꼬리표 이상의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비판자들은 틀림없이 내가 복음주의 출판사들에서 책을 냈으며, 고백적 복음주의자 연합의 팟캐스트를 공동 진행한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나는 윤리·공공정책센터의 ‘시민 생활 속 복음주의자들’ 프로그램에 연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다만 참여에 동의할 당시 내가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한 것도 바로 그 ‘복음주의’라는 말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복음주의자이자 복음주의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리고 그렇다.
미국에서 보낸 25년 동안 나는 전국 규모의 복음주의 대회 세 곳에서 연설했다. 그러나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 정교회, 심지어 세속 단체들의 비슷한 행사에서도 연설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꼬리표가 붙지는 않았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나를 복음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지도, 나를 이해하는 데 어떤 유용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나 자신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나는 보통 나를 복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우선 보편 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다음으로 개신교인이며,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이다.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앙 정식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편 교회의 신앙을 따른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주장과 로마 교회의 성사 체계를 거부하기 때문에 개신교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 가르침의 요약으로 받아들이고, 장로정치를 교회 통치의 올바른 형태로 여기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이다.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하자면, 나에게는 더 이상의 범주가 필요하지 않다. 하물며 합의된 지도 체계도 없고 신학적 합의도 이루지 못했으며, 나와 공통점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사람들, 실제로는 내가 그 견해 상당수를 단호히 거부할 사람들과 나를 한데 묶어 놓는 범주라면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
복음주의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이 용어는 어떤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헌신하는 곳은 자신이 속한 지역 교회이다. 그중 일부는 교단에 대해서도 강한 충성심을 느낀다. 그러나 ‘복음주의’처럼 모호한 것에 대한 헌신이 많은 이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어쩌면 이제는 이 말을 오직 형용사로만 사용하여, 일련의 공통된 특성, 곧 ‘가족 유사성’을 묘사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베빙턴이 제시한 네 가지 특징, 곧 성경의 권위를 높이 인정하는 태도, 십자가에 대한 집중, 회심에 대한 강조, 행동하는 신앙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한 특징 가운데 일부나 전부를 보이는 개인이나 단체라면 ‘복음주의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복음주의’라는 말이 형용사의 지위로 내려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복음주의가 존재하는 데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음주의를 정의하지는 못할지 몰라도, 보면 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말을 그 정도의 지위로 내려놓는 일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나는 문화적·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복음주의자가 충분히 있는지를 두고 걱정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나는 그런 자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연방대법원에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면 기쁘다. 그들이 개신교인이라면, 적어도 보편 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개신교인이라면 더 기쁠 것이고, 마침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이라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나의 반응은 같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이다.
반면 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했으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인물을 자신의 영적 스승으로 여기는 복음주의 번영신학 여성 설교자가 백악관의 신앙 자문역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는 기쁨도 감사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복음주의자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속한 그 어떤 운동에도 속해 있지 않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내세우는 단체와 기관의 문제는, 자신들이 복음주의의 기준이라고 여기며 따라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다른 이들을 대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질적인 집단들의 갈등 무대가 언제나 된다는 데 있다. 물론 교단들도 비슷한 다툼을 겪는다. 그러나 교단에는 그러한 싸움을 다룰 공식적인 구조와 확립된 절차가 있는 반면, 잡지와 대회, 심지어 신학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이러한 기관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대개 각자 자신이 그 기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들 사이에서 진행되며, 분쟁을 해결할 장치는 없다.
그 결과 비공식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이는 흔히 무질서한 소셜 미디어 공방을 통해 표출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혼란은 복음주의라는 말을 실체화할 때 생기는 문제를 보여 주는 실제 사례이다. 느슨하게 특징을 묘사하던 용어가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말로 바뀌는 것이다. 모두가 비난에 가세한다. 분노의 수사 뒤에 자신의 기쁨을 간신히 감추는 이들까지도 말이다.
나는 논평가들이 앞으로 ‘복음주의’라는 말에 더 적은 의미와 역할을 짊어지게 하리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 말을 아예 버리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에는 복음주의의 우호자들과 적대자들 모두에게 걸려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주의는 적대자들에게는 매를 대신 맞힐 유용한 대상이자, 우호자들에게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게다가 편리하게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발언의 발판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라는 말을 버리는 데에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보편 교회의 신경들과 실제 교회들을 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