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활 시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그것이 인류 전체에 지니는 의미를 묵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흔히 깊이 있게 분석되지 않는 한 부분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특히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스카리옷 유다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인 답은 유다가 돈 때문에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유다가 “도둑이어서 돈궤를 맡고 거기에 넣은 것을 훔쳐 쓰곤 했다”(요한 12,6)고 기록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은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배반의 대가를 요구했고, 그 결과 “그들이 은 서른 닢을 달아 주었다”(마태 26,15)고 전한다. 은 서른 닢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몇 달치 임금에 해당하며, 괜찮은 토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이익 동기만으로는 이야기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접한다. “유다는 예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은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 없는 피를 팔아넘겼습니다’”(마태 27,3-4)라고 말한다. 배반 행위에 대해 후회하는 것과, 그로 인해 얻은 모든 이익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더 나아가 유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사실들은 또한 유다가 분노 때문에 행동했다는 이론 역시 약화시킨다. 이 가설에 따르면, 유다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고 처음에는 예수가 그 기대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정치적 행동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자, 유다의 희망은 무너졌고 충성심은 분노로 바뀌어 결국 환멸 속에서 예수를 권력자들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 역시 예수의 유죄 판결에 대해 유다가 느낀 깊은 후회를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유다의 심리를 매우 낯설고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태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본다. 유다의 길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 어쩌면 대부분에게도 익숙한 길이다.
1세기 유대인들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로마의 잔혹한 군사 통치 아래 있었고, 심각한 경제적 착취와 공동체의 붕괴, 그리고 종교적 삶에 대한 지속적인 간섭을 겪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다 역시 로마의 억압에 지쳐 있었으며,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본 유다는, 그분이 마술이든 하느님의 영이든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람과 파도까지도 복종하는 이분 앞에서 로마 제국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무 인내하시거나, 혹은 그 능력을 사용하여 로마 제국을 전복하고 성경이 예언한 다윗의 왕좌를 세우는 데 충분한 동기를 가지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촉매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예수께 그 기적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순하고, 심지어 온화한 배반—입맞춤으로 이루어진—이 혁명을 촉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그때야말로 예수께서 초월적 능력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유다는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가 기대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불공정한 재판에서부터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그 기적적 능력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고, 예수께서는 온갖 고통스러운 학대를 온순하게 받아들이셨다. 심지어 어린 양조차 그보다 더 저항했을 것이다.
결국 유다는 “죄 없는 피”를 배반한 것에 대해 절망에 빠졌고, 자살에 이르렀다.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선한 한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이중의 실패였다.
만약 유다가 실제로 이러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행동은 우리에게 훨씬 이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이론의 설명력은 복음서의 이야기뿐 아니라 훨씬 더 넓은 범위에 적용된다. 그것은 단지 한 사람, 이스카리옷 유다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준다.
유다의 길은 역사 전반에 걸쳐 매우 흔하게 나타나며,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상황을 진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모든 미국인은 이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부패하고 위험한 지도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더 정의로운 시민 사회를 상상할 수 있으며, 더 나은 지도자, 더 공정한 법, 더 신뢰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기대할 수 있다.
올바른 정책이 시행되고, 그것을 실현할 적절한 사람들이 선출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바람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 참여 자체는 옳고 선하며 정당하다.
그러나 진지한 정치 참여는 쉽게 우상숭배로 변질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정치적 정의에 대한 열망에 의해 압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책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개인적 회개의 추구는 국가적 부흥에 대한 욕망으로 대체되고, 우리 마음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지상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길이 강력하고 널리 퍼진 유혹인 이유이다. 그것은 진리에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정책은 중요하고, 세상의 정의는 의미 있으며, 언젠가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길은 예수의 길보다 훨씬 쉽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영적 쇄신은 가장 깊은 차원의 개인적 회개를 요구한다. 정치적 변화는 어렵지만, 마음의 변화는 기적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믿어 온 우리조차도, 그분을 정치적 정의를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개인의 영적 쇄신보다 정치적 목표를 앞세우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의 길은 마음의 혁명이다. 유다는 이를 보지 못했고, 우리 또한 그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