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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13] 종교 자유에 대한 두 가지 비전

2026-04-19 08:30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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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 앤더슨 Owen Anderson is a professor of philosophy and religion at Arizona State University and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God. 종교학 교수


미국이 독립선언 250주년에 다가감에 따라, 미국인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정치 질서를 형성한 원리들을 성찰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자연법과 자연의 하느님”에 호소하면서, 인간의 평등과 권리를 초월적 근원에 기초시키고 있다. 그러한 권리들 가운데서도, 종교의 자유만큼 미국의 실험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 준 것은 거의 없으며, 이는 권리장전의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종교 자유의 의미는 우리가 때때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명하지 않다. 다원주의에 헌신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민주국가인 인도와 비교해 보면, 양심의 자유를 사회들이 얼마나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 나는 최근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 곳의 서로 다른 대학을 방문하며 인도에 머물렀는데, 이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1950년에 시행된 인도 헌법 제25조는 양심의 자유와 종교를 “고백하고, 실천하며, 전파할” 권리를 보장한다. 동시에 인도의 많은 주들은 흔히 반개종법이라 불리는 법률들을 시행하고 있다. 이 법률들은 “강제”, “사기”, 또는 “유인”을 통해 이루어진 종교 개종을 금지하는데, 여기서 “유인”은 때때로 “현혹”이라고도 불린다.

1977년의 중대한 판례 ‘Rev. Stanislaus v. State of Madhya Pradesh’ 사건에서 인도 대법원은 그러한 법률들을 합헌으로 유지하였다. 법원은 제25조가 종교를 전파할 권리, 곧 자신의 신념을 퍼뜨릴 권리는 보호하지만, 다른 사람을 개종시킬 근본권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 구별은 타당해 보인다. 종교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신앙 문제에서 강압이나 기만을 금지하는 데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협박, 위협, 또는 금전적 대가를 통해 얻어진 개종은 결코 양심의 행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업이나 교육 같은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도 물리적 강제나 기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려움은 유인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있다. 많은 반개종 법률들은 유인을 선물, 고용, 교육, 재정 지원, 혹은 신분 향상에 대한 약속 같은 물질적 또는 사회적 이점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일부 새로운 법률들은 더 광범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비판자들은 그러한 문구가 국가로 하여금 종교적 주장들의 내용 자체를 판단하는 데까지 개입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우려가 생기는 이유는 종교가 본성상 약속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사도 16,31).

이슬람은 신실한 이들에게 낙원을 약속한다. 힌두 전통은 윤회의 순환으로부터의 해탈을 말한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다. 종교적 가르침은 단지 의식이나 도덕 규범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 진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주장을 제시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선포를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유인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핵심이다. 그것은 충성을 대가로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는 말이 아니라, 진리와 구원에 관한 주장이다. 그러나 종교 문제에서 설득을 규제하려는 법적 틀은, 이러한 선포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불가피하게 제기한다.

그러므로 더 깊은 문제는 철학적인 것이다. 도대체 양심의 자유는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 질문에 드물 만큼 명료하게 답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그의 유명한 「종교세 부과에 반대하는 기념과 항의」에서 종교는 “모든 사람의 확신과 양심”에 맡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신앙은 창조주에 대한 의무와 관련되기 때문에, 매디슨은 그것이 시민 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고 보았다.

신앙은 강제나 시민적 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과 확신”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 정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도록 권장할 수 있다. 또 폭력과 강압을 막음으로써 신앙을 보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떤 사람에게 신앙을 갖게 만들 수는 없다.

매디슨의 주장은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개인들이 종교 문제에서 자신의 양심을 따를 권리를 가진다면, 그들은 또한 자신의 신념을 바꿀 권리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바꿀 권리를 가진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로저 윌리엄스는 이 원리를 한 세기 이상 앞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로드아일랜드의 창립자인 그는 시민 권력이 자신이 “영혼의 문제들”이라고 부른 영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할권도 갖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신앙은 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설득으로써만 생겨난다. 정부가 신앙을 규제하려고 시도할 때, 그것은 두 제도를 모두 타락시킨다. 곧 교회는 정치 권력에 의존하게 되고, 국가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권위를 떠맡게 된다.

따라서 미국의 전통은 복음 선포를 위협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종교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선포하고, 그것을 힘 있게 논증하며,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공동체에 참여하게 할 자유를 누렸다. 개종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자유사회에서 설득이 낳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되었다. 수정헌법 제1조는 종교에 관한 활발한 공적 논쟁을 통해 가장 잘 존중된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183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역동성에 매료되어 이를 관찰했다. 국교들이 흔히 정치적 특권에 의존하던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 종교는 강제가 아니라 대체로 설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토크빌은 종교 제도들이 정치 제도들과 대체로 구별된 채 남아 있었고, 사람들의 확신과 습관, 그리고 도덕적 삶에서 힘을 끌어냈다고 지적했다.

이 접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것은 사이비 종교들도 경쟁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신앙에 대한 위로부터의 폭정이 아니라, 더욱더 많은 공적 논쟁이다. 사이비 종교들이 제기하는 주장들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빛 가운데로 끌어내라. 이것이 모든 사람이 진리로 돌아설 것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누가 의도적으로 외면하는지는 분명히 드러내 준다.

인도의 반개종법은 다른 역사적 우려에서 생겨났다. 유럽처럼 인도도 폭력적인 종교 전쟁들을 경험해 왔다. 깊은 공동체적 긴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사회에서, 입법자들은 공격적인 포교가 사회적 조화를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인도 대법원의 논리도 이러한 불안을 반영한다. 곧 개종은 다른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를 방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종은 양심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양심의 행사이다. 개종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다른 신념 체계가 참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여기에서 ‘개종’이라는 단어의 모호성이 오해를 낳는다. 폭력에 의한 개종도 있을 수 있고,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했던 것처럼 복음을 이성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개종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파와 개종 사이의 구별은 유지하기가 어렵다. 설득이 성공하면 개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말할 권리는 보호하면서 설득할 권리는 보호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둘 다에 한계를 설정하게 된다.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이 설득과 그에 따른 개종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한다면, 그는 스스로 검열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미국의 헌정 전통은 다른 길을 택했다. 국가가 종교적 설득을 규제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대신, 궁극적 진리에 관한 경쟁하는 주장들이 공적 광장에서 자유롭게 논의되도록 허용했다. 시민들은 설교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설득하고, 다른 이들을 개종시키려 시도할 수 있었지만, 폭력이나 기만을 통해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 체제는 종교적 불일치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놀라운 일을 해낸다. 그것은 불일치를 강제가 아니라 설득의 통로로 이끈다. 그러나 여기에는 긴장이 있다. 무엇이 기만으로 간주되는가? 모든 거짓 종교는 그 거짓 약속들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정부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 하나는 기만하는 자가 의도적으로 거짓말하는 경우의 의식적인 기만이다. 다른 하나는 기만하는 자 자신도 속고 있는 경우의 기만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만은 오직 공적 논쟁과 빛에 드러남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통해서도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

미국이 독립선언 25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 이 원리는 여전히 미국의 실험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종교의 자유는 단지 사적으로 신념을 간직할 자유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신념을 선포하고, 변호하며, 다른 이들도 그것을 믿도록 초대할 자유이다. 그것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엄정한 공적 논쟁을 벌일 자유이자 의무이다.

그러한 설득을 허용할 만큼 자신감 있는 정부는 양심의 자유와 진리의 전진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낸다. 그리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해했듯이, 바로 그러한 신뢰가 종교 자유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보루로 남아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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