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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25] 탈자유주의에 대한 논쟁

2026-05-01 07:06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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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R. 리노 R. R. Reno is editor of First Things. 편집장


나는 탈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싫증이 난다. 그래서 재커리 체임버스의 글 「자유주의의 논리」(『로 앤 리버티』, 2026년 3월 18일)를 읽게 되었을 때도 내키지 않았다. 그 글은 “이 새로운 우파 이데올로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늘 쓰이는 공포 조성용 단어들이 동원된다. 

“전체주의적”, “권위주의적”, “반혁명적”이라는 말들이다. 우리는 이런 말도 듣는다. “탈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 운동을 전복하고 훼손하려 위협한다.” 이 보잘것없는 필자 역시 체임버스가 보기에 위험하고, 또한 반미국적인 사유 방식의 목소리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그 시야는 거창하다. 근대인은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배웠다. 진리는 개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의미의 방향은 뒤집혔고, 이제 인간의 내면에서 나와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당신은 이 “방향”이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가? 체임버스는 헤겔을 읽어보라고 말한다. 헤겔은 “근대 철학이 어떻게 그 논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규범적 주장, 심지어 윤리적 주장까지 계속 제기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헤겔에 호소하는 것은 눈속임에 가깝다. 탈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체임버스의 논증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진리라는 논리를 지닌 자유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라는 주장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진리와 공동의 사랑들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상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소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헛된 일이라고 한다. 

“개인적 주관성의 종은 한 번 울리면 다시 울리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없고”, “사람은 어린 시절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익숙한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수십 년 전, 나는 유명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루스 마커스의 대학원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다. 지정된 독서 자료는 근대적 역사 의식의 이른바 중요성에 관해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마커스는 이 교조를 일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한 시간만 함께할 수 있다면, 그는 뉴턴 물리학의 진리를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어쩌면 그녀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은 나로 하여금, 내가 앞서 살았던 이들, 심지어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이들과 어떤 식으로든 근본적으로 동떨어져 있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역사적 변화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건널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심연 같은 것은 없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는 손가락을 튕긴다고 해서 건국 당시의 미국 사회를, 혹은 나의 어린 시절 미국 사회를 다시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토크빌을 읽음으로써 내 판단을 형성할 수 있고,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함으로써 사회적 선들—그리고 악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의 노력들과 그 밖의 여러 노력들을 바탕으로, 나는 오늘날의 신학적·도덕적·정치적 논쟁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형성하려 한다. 

내가 참되고, 정의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논쟁하는 것이다. 더욱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이 상투적 진리는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나는 근대 서구에 의해 형성된 21세기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내가 동성 결혼이 자연법과 하느님의 계시에 반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유와 평등이 정의로운 사회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라고 지적할 때, 나는 정의상 “오늘의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어제의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주장하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오래된 술책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역사의 명령’이라는 왕관을 씌운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플루타르코스와 키케로를 읽었다. 그들은 로마 공화정이라는 정치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 건국 당시 베네치아와 네덜란드는 공화국이었지만,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은 이런저런 형태의 군주국이었다. “역사”는 미국 헌법에 불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건국자들은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묘사한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 시대와 장소의 미국 국민에게, 자신들의 판단으로 가장 훌륭한 정부 형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사료와 사상적 원천들을 역사적 시간표 위의 위치가 아니라, 그 적실성에 따라 끌어왔다. 내가 아는 탈자유주의자들도 같은 일을 한다. 커티스 야빈은 우리에게 군주제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그것은 향수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적 절차가 기능 부전에 빠졌고 미국이 직면한 문제들은 강력한 행정적 행동을 필요로 한다고 그가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보다 사랑이 우선한다는 논증들을 제시해 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자유의 문화가 강하고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사랑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사랑이 권위의 언어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지적해 왔다. 자유주의는 바로 이 권위의 언어를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야빈의 성찰과 나의 성찰은 분명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위협”인 것은, 반대 의견이 언제나 기존의 합의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런 논쟁들이 피곤하다. 체임버스는 거창한 경고로 글을 끝맺는다. “탈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유에 대한 우리의 바로 그 개념들을 위협한다.” 이것은 과장을 넘어선 것이다. 낙태, 의사 조력 자살,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 트랜스 휴머니즘적 망상—“인간에 대한 우리의 바로 그 개념”을 위협하는 것들은 이미 분명히 드러나 있다. 워크 이데올로기의 검열, 경제적 불안정,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허무주의—자유의 조건들은 침식되어 왔다.

개인을 강하게 강조하는 자유주의가 우리를 현재의 불행한 상태로 이끄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인가? 그리고 인간 존엄을 보호하고 자유의 문화를 지탱할 가능성이 더 큰 사회를 향해 방향을 돌리고 길을 그려 나가는 데, 자유주의가 거의 아무런 지침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일인가?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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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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