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유산, 곧 우리가 “문화적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세계가 남긴 문화적·정치적·지적 전통과 제도를 보존하고자 하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현대 민주주의, 지적 정직성, 진리 추구는 그리스도교의 열매이며, 그것들이 침식된 결과는 정치, 학계, 언론 전반에 걸쳐 심각한 영향을 끼쳐 왔다. 그러나 문화적 그리스도교가 무분별한 개혁에 저항하는 보수적 힘으로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핵심 사명인 구원과 회개에서 분리될 때에는 결국 불충분할 뿐 아니라 자기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공적 광장에서 친그리스도교적 목소리들은 매우 귀중할 수 있으며,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현실과 거의 관련이 없는 향수 어린 이상에 집착하게 된다. 본당 생활에서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런 사람들은 다루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들은 이상한 기대나 요구를 가지고 나타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그들은 교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떠나버리기보다는 어느 정도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렇게 하며, 자신들의 열정을 교회의 사명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을 잊는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생존 본능이 앞서게 되고, 그들은 신앙의 본질적 부분들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문화와 제도, 더 나아가 겉모습까지 유지하려 한다.
여기에 “문화를 복음화”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인 위험이 놓여 있다. 교회는 실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우리는 개인들과 가정들을 상대하는 일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보다 덜 난잡해 보이는 “문화”를 복음화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문화가 어떤 영향력을 지니고 있든, 문화는 부수 현상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것은 인간 문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이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아름다움을 우상으로 만들 위험에 빠진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심미주의가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개혁 전례와 전통 전례를 막론하고 스스로 전례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그러하다. 온라인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미학에 대한 관심은 영혼들의 구원, 곧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로부터 주의를 빼앗을 수 있다. 복음화가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음화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자신의 초월적 자매들인 진리와 선보다도 훨씬 더 쉽게 조작되고 타락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그리스도교가 교회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변화에 대한 그 고유한 저항성 덕분에, 그것은 대중 신심과 전례를 끝없이 갱신하고 개혁하려는 흐름에 맞서 싸운다. 그것은 전례 공간과 전례 행사들을 “개선”하려는 엘리트들의 기획에 맞서 전통을 붙든다. 그러한 기획들은 흔히 교리적 토대가 빈약하고, 성직자주의와 중앙집권주의, 온정주의에 의해 강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인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한다. 동시에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성직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계시에 뿌리내리지 않은 신학적 정당화를 만들어내는 경향을 공유한다. 독일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여러 시노드는 이 경향을 증언한다. 구조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교리적으로는 유동적인 것이다.
문화적 그리스도교의 넓은 스펙트럼 앞에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것은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그리고 모든 성인들과의 소통과 친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일하는 목적이며, 바로 이것이 교회이다.
이 친교는 회개와 구속에 관한 것이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남아 있는 것들의 파괴를 막는 데 강력한 동맹이 된다. 그러나 재건과 복음화에 있어서는 살아 있는 신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방향성, 동기, 인내가 그들에게 부족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를 단죄하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문화적 그리스도교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기도는 믿음과 행동을 가르친다.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과 행동의 법을 가리킨다. 그 반대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문화를 건설하는 것은 병행되는 별도의 과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성인들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고 통합하려는 교회 사명의 결과이다.
이는 흔히 우리 눈앞에 있는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시작된다. 여기에는 식별이 필요하다. 곧 우리의 삶 안에 이미 남아 있는 잔재와 가치들을 알아보는 동시에, 무엇이 상실되었고, 무엇이 결여되어 있으며, 무엇이 타락했는지에 대해서도 정직해야 한다.
문화적 그리스도교는 깊이 양가적인 현실이다. 그것이 교회와 분리되어 멀어지고,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충만함인 것처럼 가장할 때, 그것은 보존할 가치가 없다. 그러한 잘못된 방향의 문화적 그리스도교는 주의를 흐트리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의 탈그리스도교적 상황에 막대한 기여를 해 왔다.
교회는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배반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몇 가지 “유용한” 요소들을 붙들어 두려는 세속적 기획은 실패했으며, 이제 포기되어야 한다. 단순한 아우구스티누스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이다.
문화적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표류를 뜻한다면, 급진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전적으로 투신할 용기를 찾아야 하며,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