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달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키이우-할리치의 스비아토슬라우 셰우추크 상급대주교로부터 새벽마다 심각한 상황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아오고 있다. 대개 그 메시지는 이 영웅적인 교회 지도자가 밤새 방공호에서 지낸 뒤에 보내온다.
그는 지난 4년 반 동안 이런 일을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겪었다. 메시지에는 러시아의 미사일과 무인기가 우크라이나 수도를 타격하며 밤하늘을 불태운 지점을 표시한 디지털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그 지도에는 군사 표적이 하나도 없다. 러시아의 공격은 의도적으로 민간 시설을 겨냥한다. 우크라이나 방공망이 미사일과 무인기 일부를 격추하지만, 나머지는 방공망을 뚫고 들어온다. 민간인 사상자를 의도적으로 발생시키려는 이 작전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
6월 15일에는 러시아 무인기가 역사적인 정교회 수도원인 키이우 페체르스크 라브라, 곧 ‘동굴 수도원’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쯤 되면 ‘그리스도교 문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차르 푸틴의 실상이 드러난 셈이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테러다. 그 목적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사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영국에 가한 대공습이 영국인의 의지를 꺾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21세기의 퀜틴 레이놀즈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보도하고 있다면, 독일 공군의 공격에 맞선 영국인의 강인함과 결의를 “런던은 견뎌낼 수 있다”라는 말로 요약했던 것처럼, 아마도 “키이우는 견뎌낼 수 있다”를 대표 문구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키이우가 이런 공격을 견뎌내야 할 이유는 없다. 키이우가 이 같은 테러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오직 차르 푸틴이 자신이 2022년 2월 24일에 시작한 지상전에서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병사들의 생명을 철저히 경시하며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있다. 그 결과 러시아 측에 참혹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복을 불명예로 여기는 세속적 민족주의의 무사도 정신에 호소하며 죽을 때까지 싸우려는 태도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러시아의 야만 행위는 그보다 더욱 심각하다. 그 행위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에 대한 호소를 통해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2022년 3월 6일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행한 강론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종교적으로 정당한 성전으로 묘사하려 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전격전을 통해 키이우를 점령하려 했으나 진격이 막힌 상태였다. 키릴 총대주교는 이 전쟁을 그리스도교 국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합류하기를 열망하는 사탄적인 서방 사이의 거룩한 전쟁으로 포장하려 했다.
그 거짓말이 신성모독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신성모독에 준하는 주장이었다.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축복하려는 이 모독적인 시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정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동등한 이들 가운데 첫째’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르톨로메오 세계 총대주교는 이를 규탄했다.
이 모든 사실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화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관하여 긴급한 질문을 제기한다.
1940년 독일군의 영국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겨자가스를 사용할 준비까지 했던 윈스턴 처칠은 무력 사용을 주저하는 유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처칠은 인간사에서 적용되어야 할 일반 원칙으로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이 전쟁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이 격언은 훗날 해럴드 맥밀런에 의해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낫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그러하다. 교황 레오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전쟁은 언제나 인류의 패배라고 지적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런가? 우리는 이성적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이성이라는 은총의 선물은 인간의 갈등을 대규모 폭력 없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갈등은 세상 끝날까지 인간 조건의 일부로 남겠지만, 이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개탄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개탄해야 할 것이 그것만은 아니다.
폭정에 굴복하는 것 역시 개탄해야 한다. 한 나라와 그 문화를 말살하려는 집단학살적 시도에 사실상 동의하는 것도 개탄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차르 푸틴이 공언한 목표다. 한 나라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고의로 비전투원을 공격하는 폭군과 살인자들에게 매일 목숨을 걸고 맞서는 이들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것 또한 개탄해야 한다.
더욱이 비례성의 원칙을 지키고 군사 표적과 비전투원을 엄격히 구별하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안보와 자유, 정의로 이루어진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 대화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침략자 또는 그를 권좌에 머물게 하는 이들에게 정복의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침략을 계속할 경우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해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와 실질적인 협상이 가능해지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록 비극적인 대가를 치른 뒤라 하더라도,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성이 본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