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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부터 1961년까지 중국 전역을 휩쓴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 시대가 남긴 가장 참혹한 정치적 재앙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공업과 농업 생산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끌어올려 서방 국가를 추월하겠다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야심은 결국 국가 전체를 허위 생산보고와 강제 동원, 농업 붕괴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 결과 평시로서는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대약진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대부분 농촌 주민들이었다. 특히 허난성을 비롯한 일부 농업지역에서는 식량 부족과 과도한 국가 수매, 집단화 정책이 겹치며 수많은 농민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약진의 출발에는 냉전기의 과도한 생산경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57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일정 기간 안에 미국의 공업생산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내세우자, 마오쩌둥은 중국 역시 영국을 단기간에 추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중국 각 지역에는 현실을 무시한 생산 목표가 하달됐다.
상부의 목표를 맞추기 위해 지방 간부들은 실제 생산량보다 훨씬 부풀려진 수치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는 이렇게 왜곡된 통계를 토대로 다시 더 많은 곡물을 수매했고, 농촌에는 정작 먹을 식량이 남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농업 현장에도 이른바 ‘선진 농법’이라는 이름 아래 깊이갈이와 지나친 밀식 등이 강요됐다. 과학적 검증보다 정치적 충성심이 우선되면서 토양과 농작물은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대풍작’을 선전하기 위해 곡식 아래에 짚을 깔아 수확물이 산더미처럼 보이도록 연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현실을 말하는 것이 정치적 위험이 된 체제에서는 거짓이 정책이 되고, 거짓 정책의 대가는 결국 주민들이 치러야 했다.
농민들은 농사만 지은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논밭을 떠나 댐과 운하 등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됐으며, 이른바 ‘대약진 제강운동’에는 가정의 솥과 농기구, 생활용 철제품까지 동원됐다.
1958년 이후 인민공사가 확대되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도 국가 통제 아래 놓였다.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식사하는 대신 집단식당을 이용하도록 강요됐고, 처음에는 식량이 넘쳐나는 것처럼 선전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의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1959년 이후 기근이 본격화되면서 농촌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다 길에서 숨지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식인 사례까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당국이 이러한 비현실적인 정책을 본격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 것은 1961년에 들어서였다.
대약진으로 인한 사망자 규모는 연구자마다 차이가 크다. 일부 인구학 연구에서는 최소 1천600만 명대에서 2천700만 명가량으로 추산하며, 다른 연구에서는 4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정확한 숫자를 둘러싼 논쟁과 별개로, 수천만 명 규모의 인구 손실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대약진 시기의 대기근은 20세기 최악의 인도주의적 재앙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참사가 오늘날까지도 중국 사회에서 충분히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당국은 오랫동안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기근을 ‘3년의 어려운 시기’ 등의 표현으로 설명해 왔다. 기근의 정치적 원인과 정책 책임보다는 자연재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다.
문화대혁명과 비교해도 대약진과 대기근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훨씬 희미하다. 국가 차원의 대규모 추모행사도 찾기 어렵고, 학교나 대중매체에서 대기근의 실상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일도 제한적이다.
가장 큰 피해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허난성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민감한 역사로 남아 있다. 과거를 공개적으로 증언하거나 책임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침묵은 국가기관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 내부에서도 대기근은 말해서는 안 되는 역사로 취급됐다.
당시를 경험한 부모 세대는 자녀가 밖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가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경험조차 말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 중국인은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 “왜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느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회고했다. 훗날 그는 아버지가 진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대약진의 비극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잊힌 역사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말하면 위험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웠던 사회에서 형성된 침묵, 즉 ‘강요된 망각’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대약진은 한 지도자의 비현실적 목표와 개인숭배, 허위보고를 막을 수 없는 권력구조가 결합할 때 국가 전체가 얼마나 빠르게 재앙으로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수천만 명의 고통과 희생을 초래한 역사적 참극이 제대로 기억되고 토론되지 못한다면, 그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다.
과거를 감추는 정권은 역사를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희생자의 고통까지 지울 수는 없다. 대약진의 진실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연구가 아니라 권력이 인간의 생명보다 우위에 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고하는 일이다.
장·춘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