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반기 총회에서, 교회의 최고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D. 토드 크리스토퍼슨은 “도박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는 교회 신자들에게 이 파괴적인 행위를 버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삶을 살아가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의 우려는 도박이 개인에게 미치는 위험을 넘어, 도박이라는 행위가 도박꾼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웃을 어떻게 바라보도록 길들이는지에까지 미쳤다. 크리스토퍼슨과 같은 지도자들의 지침을 신자들은 영적으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크리스토퍼슨의 발언은 온라인 도박이 만연한 시점에 나왔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열풍을 부추긴 온라인 시장은 세 가지다. 온라인 스포츠 베팅, 온라인 카지노형 게임, 그리고 예측 시장이다. 한때 카지노처럼 지정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던 제한적인 활동이 이제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나 가능해졌다. 크리스토퍼슨에 따르면, 이 때문에 도박의 부식적인 영향은 더욱 해로워진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도박에 명시적으로 반대해 왔지만, 후기 성도들, 특히 젊은 신자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2005년 이후 도박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오늘날의 대학생 또래 후기 성도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갓난아이였다.
『애틀랜틱』의 매케이 코핀스는 유타주 대학 캠퍼스들을 찾아 강연해 왔다. 온라인 도박을 1년간 직접 해 본 경험을 담은 그의 장문 에세이는 크리스토퍼슨의 연설에서도 인용되었다. 그는 “내가 만난 [후기 성도] 학생들 가운데 많은 이가 도박을 도덕적 관점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는 스포츠 베팅이나 예측 시장을 도박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슨의 연설을 들으며 탄식하는 대학생 또래 남성들의 모습을 담고, “지금 모든 후기 성도 남자들의 모습”이라는 설명을 붙인 인스타그램 릴스 영상은 조회 수 380만 회, ‘좋아요’ 10만 개를 넘겼다.
크리스토퍼슨의 연설은 이 학생들에게 결여된 “도덕적 관점”을 제공한다. 도박의 핵심에 놓인 욕망, 곧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망은 개인을 안으로부터 부식시킨다. 도박은 개인을 중독과 재정적 파탄이라는 어두운 길로 이끌 수 있으며, 그 모든 과정에서 더 가치 있는 일들이 희생된다.
이러한 논거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세계에서 도박은 절제하지 못하는 태도와 진지함의 결여에 연결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이 신임하는 장군들 앞에서 도박하는 모습을 들키자 부끄러워했다. 로마인들 역시 도박을 악덕으로 여기고 엄격하게 규제했다. 초기 미국인들도 도박을 하지 못하도록 권고했다. 크리스토퍼슨과 코핀스가 모두 지적하듯이, 조지 워싱턴은 도박을 “탐욕의 자식이자 불의의 형제이며 해악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슨의 우려는 도박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넘어선다. 그는 도박이 도박꾼과 이웃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걱정한다. 도박은 이익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으며, 크리스토퍼슨에 따르면 이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과……양립하기 어렵다.” 그의 가르침의 근저에는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데 대한 반대가 있다.
도박은 도박꾼이 타인을 도덕적 가치를 지닌 개인이 아니라 이익의 원천으로 바라보도록 길들인다. 그는 좋은 삶이란 “다른 사람들이 더 나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박은 이러한 관계를 뒤집는다. 누군가가 잃어야만 다른 누군가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박 산업 전체도 “고객들이 돈을 잃는 것을 토대로 세워져 있다.”
코핀스는 스포츠 베팅을 하던 기간에 선수들이 도박꾼의 개인적인 드라마 속에서 일종의 “인간 이하로 취급되는 엑스트라”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적어도 한 선수는 부진한 경기력 때문에 살해 협박을 받은 경험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온 공 놓침으로 내기에서 돈을 잃자, 코핀스 자신조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러닝백, 곧 한 인간에게 “비이성적인 증오”를 느꼈다.
이러한 통찰 역시 풍부한 지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박꾼들”을 “마땅히 무언가를 주어야 할 친구들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러한 우려를 되풀이하며, 도박꾼은 친구들을 “먹잇감으로 삼는다”고 지적한다.
이는 모든 도박꾼이 자신의 이웃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도박이라는 체계가 부추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다. 실제로 크리스토퍼슨은 이러한 함정을 피할 만큼 강인하여, 탐욕을 품지도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도 않은 채 그저 재미로 가끔 내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올바른 삶의 길잡이”로 바라보지 않겠는가? 겉보기에는 이처럼 무해한 재미조차 “더 나약한 형제나 자매”를 유혹으로 이끌 수 있지 않겠는가? 크리스토퍼슨은 바오로 사도의 말을 인용한다. “여러분의 이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 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다면 도박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도덕적으로 부식시킨다. 크리스토퍼슨은 교회 회장인 댈린 H. 옥스의 이전 연설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주는 길”과 “악마의 빼앗는 길”을 대비한다. 옥스는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가져오면서 “그 대가로 가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영적 감수성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을 무한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개인으로 바라보고 대하는지, 아니면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바라보고 대하는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형성한다.
예측 시장은 인간 상호작용이 게임으로 바뀌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크리스토퍼슨이 열거한 내기 대상은 금리에서 산불, 그리스도의 재림 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코핀스는 마약 운반선 폭격과 가자 지구의 기근 발생 여부에 관한 계약, 곧 거래 가능한 내기 상품들을 발견했다. 그러한 계약을 거래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극을 하나의 투자 포지션, 곧 돈벌이의 기회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크리스토퍼슨은 이것이 투자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투자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투자 수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세 경기의 결과를 묶은 베팅을 초조하게 확인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 혹은 그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거래하는 시장은 우리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냉소적인 관찰자가 되도록 부추기며, 이웃 사랑과 건설적인 참여보다 돈과 승리의 짜릿함을 더 가치 있게 여기도록 한다.
그렇다면 도박의 위험은 우리가 돈을 잃을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의 연속으로, 이웃을 그 이익을 추구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크리스토퍼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른 길로 부르신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들의 선익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후기 성도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은 분명하다. 예측 시장을 포함한 도박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크리스토퍼슨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