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미국이 공식적으로 “하느님 아래 하나의 나라”로 다시 봉헌된 바로 그날, 프랑스 영화 ‘승리 아니면 죽음’이 어두운 물길을 건너온 횃불처럼 미국에 도착했다.
퓌 뒤 푸 필름스가 제작하고 뱅상 모테즈와 폴 미뇨가 연출한 이 영화는 2023년 프랑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위고 베케르가 프랑수아-아타나즈 샤레트 드 라 콩트리 장군 역을 맡은 이 역사 대서사극은 근대가 지난 두 세기 동안 묻어버리려 애써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18세기 말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전직 프랑스 해군 장교이자 미국 독립전쟁 참전용사였던 샤레트 장군이 은퇴 생활에서 마지못해 다시 나와, 새로 수립된 프랑스 공화국에 맞선 가톨릭 왕당파 반란을 이끌게 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1793년 방데의 농민들은 혁명 정부가 교회를 억압하고, 성직자들에게 국가 권력을 강요하며, 루이 16세 국왕을 처형하고, 농촌 전역에 대규모 징병을 명령하자 봉기했다. 영화는 그들의 저항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를 추적한다.
샤레트 장군은 굶주림과 탈진, 내부 분열에 끊임없이 위협받는 농민군을 이끌고 공화파에 맞선다. 공화파는 점점 더 잔혹한 방식으로 대응하며, 프랑스 국민 전체에서 왕당파적 동조를 제거하겠다고 결심한다. 선혈이 낭자하고 잔혹한 이 영화는, 무엇인가를 위해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를 극적으로 성공하게 만든다. 대사가 때때로 과장되어 보일 때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확신에 의해 고양된다. 관객은 이 사람들이 자기 집과 성당,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만큼 그들의 고통에도 무게가 실린다.
미국 관객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러한 측면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초·중등 교육에서 프랑스 혁명은 대개 거짓된 도덕극으로 단순화된다. 즉 계몽된 평민들이 자유와 이성의 이름으로 억압적인 군주제와 귀족제를 전복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승리 아니면 죽음’은 방데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가톨릭 신자들을 집어삼킨 혁명의 이념적 폭력 기계 앞에서, 그러한 구호들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낸다. 민간인과 전투원을 합친 방데의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영화의 섬세함은 그 무게를 더한다. 봉기는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경쟁하는 신학과, 그 신학을 따르는 너무나 인간적인 신봉자들 사이의 충돌로 그려진다. 혁명가들은 괴물 같은 풍자적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진짜 악역은 그들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적 열광 속에서 그들은 방데인들이 과거를 존중하는 마음이나 교회에 대한 진실한 헌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협상 장면에서 샤레트 장군의 공화파 상대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과거를 버려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샤레트 장군은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의 백성은 결코 과거를 잊지 않는다고. 이것이 혁명가와 반혁명가 사이 충돌의 핵심이다.
혁명가들은 상속받은 유산과 신앙으로부터 단절된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며,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세속적 인간학을 고집한다.
현대 서구는 여전히 그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태어난 이 이단적 이념은 단두대의 그림자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 세월 속에서 전이되고 증식하여, 20세기에는 공산주의의 형태를, 21세기에는 워크 이데올로기(성,인종차별 등을 반대한다는 진보적 이념)의 형태를 취했다.
곧 인간이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본성을 거부하고 자기 변덕에 따라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운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것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은 사회적 진보주의이다. 이 진보주의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적이고 억압적이라고 주장하며, 인간 정체성은 너무나 가변적이어서 누구나 자신의 성별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고 고집한다.
‘승리 아니면 죽음’은 “수정주의적” 영화임에도 결코 선전물로 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주로 샤레트 장군의 생애를 통해 전개되는데, 그는 불완전하고 거칠게 인간적인 영웅으로 묘사된다. 처음에 그는 무장하라는 부름을 거부한다. 이후에는 지휘의 무게 아래에서 고뇌한다. 날카로운 장면 하나에서 우리는 그가 고해소 안에서 공화파 포로들에 대한 관용을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에게 우리가 아닌 것이 되도록 가르친다.” 그의 영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전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지쳐 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기 영혼에 닥친 위험을 의식한다. 3년간의 전투 끝에 샤레트 장군은 공화국 군대에 포로로 잡히고, 처형 전 감방에 갇힌다.
그의 마지막 청원은 총살대로 가는 길에 사제에게 사죄의 성사를 받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국 당국은 전통적으로 사형수에게 허락되던 최소한의 존엄조차 그에게 거부한다. 그들은 사제를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면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박애를 약속했던 혁명은 자비를 베풀 능력이 없음을 드러낸다.
방데의 여성들 역시 마땅한 자리를 부여받는다. 마리안 샤레트 드 라 콩트리와 “샤레트의 아마존들”로 기억되는 다른 여성들은 가톨릭 왕당파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영화는 반복해서 아이들, 가족들, 마을들, 무덤들로 되돌아간다. 이는 반혁명가들이 연속성을 위해, 하느님의 질서를 위해, 후세를 위해, 온전한 세계를 물려줄 권리를 위해 싸웠다는 증언이다.
성 미카엘 메달을 단 아기를 안고 있는 샤레트 장군의 첫 장면은 적절하게 무대를 연다. 장면들이 진행되면서, 촛불이 켜진 경당들, 진흙밭, 안개에 싸인 숲, 돌마을 위로 흘러가는 연기 등 방데 시골의 풍요로운 미학이 드러난다. 가장 가슴을 찢는 장면 가운데 하나에서는 십자가가 불태워진다.
프랑스에서 반혁명군을 지휘하기 불과 몇 해 전, 샤레트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프랑스 해군으로 싸웠다. 미국 건국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하느님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종교의 자유, 자연법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방데의 정신이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대의는 모두 자유를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하느님 아래 질서 지어진 자유로 이해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 서약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그 작성자들을 “우리의 두려운 주권자이신 제임스 국왕의 충성스러운 신민들”로 규정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 국왕과 조국의 명예”를 위해 항해한다고 밝힌다. 최초의 미국인들은 깊은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어 국왕에게 위임되며, 하느님께서 재가하신 질서 안에서 가족과 공동체에 의해 행사된다고 이해했다.
이런 의미에서 방데의 농민들은 초기 미국의 영혼 안에서 매우 친숙한 무엇인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것이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서사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서사는 혁명가들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한다.
‘승리 아니면 죽음’은 방데의 기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 서부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프랑스 좌파는 이 영화를 공격했다. 그들은 이 영화가 극우 의제를 퍼뜨리고 반혁명을 낭만화한다고 비난했다. 반면 영화의 지지자들은 영웅성으로 가득 차 있으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한 장을 회복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왜 방데의 이야기는 그토록 전복적인가? 아마도 그것이 혁명적 근대성이 치른 대가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 운동들이 하느님과 기억으로부터 분리된 조건 위에서 사회를 재구성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폭로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좌파 지식인들의 신조에 위험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반혁명가들은 단지 2세기 전의 혈기 왕성한 농민들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정치 사상을 형성하는 탁월한 저작들을 남긴 심오한 사상가들이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루이 드 보날, 도노소 코르테스가 그러하다. 그들의 사상은 18세기 프랑스 정치의 범위를 넘어 오늘날의 문명적 전투에 직접 말을 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교만과 힘으로 재구성된 문명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려받은 문명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프랑스 혁명은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를 약속했다. 방데의 가톨릭 반혁명가들은 초월을 믿는 세계, 물려줄 가치가 있는 세계를 위해 싸웠다. 이 경쟁하는 두 전망 사이에서, 우리의 문명은 여전히 떨고 있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