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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330] 왜 하필 나인가? ①

2026-05-06 07:50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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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라임 래드너 Ephraim Radner is Professor Emeritus of Historical Theology at Wycliffe College. 역사신학 명예교수


몇 해 전, 나는 한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신앙이 깊은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직업 세계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에게 깊이 헌신한 부부였고, 자녀를 간절히 원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내 친구는 깊은 비탄에 빠졌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그의 성인 시절에 쌓여 온 굴욕과 실망, 상실의 경험들이 점점 더 큰 고통 속에서 하나씩 토로되었다. 어느 순간 그는 놀라울 만큼 격렬한 열정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다. “왜 하필 나입니까?!”

솔직히 말해, 그의 질문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에서, 모든 재앙은 마땅히 받을 만한 것이며 조금이라도 주어지는 선은 모두 공로 없이 주어지는 은총이라고 보는, 거대한 ‘저주받은 무리’의 일부라는 감각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럼에도 “왜 하필 나인가?”라는 말은 인간 정체성과 고통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며, 그것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딘가 불편하게 맞물린다.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개인적 감정의 제약을 훨씬 넘어 살아가는 것이며,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고립된 자아의 거대한 짐을 초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왜 하필 나인가?”라는 말은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참된 감각 바깥에서 발화된다.

자아가 고립된 것으로 보이고 또 그렇게 느껴질 때, 삶은 견디기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통은 개인주의 시대의 거대한 질문이 되었다. 찰스 테일러는 현대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유명하게 강조한 바 있다. 이제 그 명령은 인간 삶에 대한 우리 문화의 비전을 규정한다.

나의 신학교 학생들은 종종 자기 세대가 참된 “고통의 신학”을 갈망한다고 말해 왔다. 모든 세대는 고통을 염려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자아의 고통이 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삶 전체가 단 한 사람, 오직 자기 자신의 존재에만 묶여 있다면 누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언제나 자아들은 존재해 왔고, 언제나 고통도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 둘이 서로를 규정하는 것처럼 사슬로 묶일 때, 세계는 내부로 붕괴한다.

“왜 하필 나인가?”는 매우 현대적인 질문이다. 이 말은 17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때에는 구원받은 죄인이 본래 마땅히 받아야 했던 불길 속에서 자신이 건져 올려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묵상하며 내뱉는 경탄의 외침이었다. 때로 이 생각은 시편 8장 4절에 근거했다. 곧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을 개인에게 적용한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기억하십니까?”라는 구절이, 18세기 후반의 한 신심 서적에서는 이렇게 풀이된다. “제가 누구이며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기억하십니까?” 개혁파 전통이 선택 교리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경이감을 더욱 밀어붙였다.

19세기의 한 저술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선택하셨음을 보는가? 이것은 우리를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며 이렇게 말하게 한다. ‘왜 저입니까, 왜 저입니까, 오 복되신 하느님. 왜 저 같은 비참한 자입니까?’”

물론 예정론적 틀은 논리적으로, 지옥의 깊은 곳에서 단죄받은 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내뱉는 상황도 함축한다. 보다 회의적인 저술가들은 이 불편한 병행 관계를 재빨리 지적했다. “가련하게 버림받은 피조물들”이 “끝없는 구렁텅이로 가라앉을 때”, 그들 역시 이렇게 외친다는 것이다. “왜 나인가!…… 이것은 무서운 ‘왜 나인가’이다!” 너무도 무서운 일이다.

19세기에 종교적 우주가 축소되면서, 개별 영혼과 그 운명에 대한 집착은 놀랄 것 없이 개별 신체에 대한 공리주의적 염려로 옮겨 갔다. 20세기에 이르면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육체적 고통, 질병, 정신적 고뇌, 개인적 상실에 집중되었다. 지난 백 년은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적, 치료적 관점에서 “왜 하필 나인가?”를 다루거나 심지어 그 제목을 단 책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목이 졸린 듯한 도덕적 별칭이다.

우리는 고통을 새롭게 가늠해야 한다. “고통”, “수난”, “관용”이라는 말들은 모두 공통된 의미 기반을 공유한다. 그것은 “짊어짐”과 “견딤”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이 “아픔”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즉각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사실 아픔은 고통의 명시적 대상으로서는 비교적 늦게 등장한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환경, 도전, 특히 사람들을 ‘겪고 견뎠다.’ 우리는 아직도 “인내”라는 말의 용법 속에서 이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 대체로 어려운 동료들을 견디는 개인적 성향을 뜻하게 되었다. 요점은 고통이 무엇보다도 관계의 그물망 안에 자리하는 우리의 위치와 관련된다는 데 있다. 곧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완전히 혼자라면 겪을 고통도 없다. 느낄 것도 없고, 만질 것도 없으며, 만져질 것도 없다. 이것은 기본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정의상 고통을 겪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삶과 고통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본 하나의 동일한 현실이다. <계속>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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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명 |2024.11.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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