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에 헌신하는 국가를 만들어 가는 실험에 나선 지 이제 250년이 되었다. 그 먼 옛날의 사건들과 프록코트를 입고 분칠한 가발을 썼던 사람들의 숙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가? 워싱턴 D.C.에서 열린 힐스데일 대학의 제17회 연례 헌법의 날 기념행사에서 내가 맡은 과제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힐스데일은 미국의 건국 원칙에 대한 헌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모인 애국자들 앞에서,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답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다는 짓궂은 제안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다. 우리는 ‘혁명’이라고 말할 때 1776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뜻한다. 또한 우리는 전장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정부를 위한 고귀하고 항구적인 원칙들을 명확히 제시했으며, 우리 헌법을 작성한 영웅적인 세대를 가리키는 ‘건국자들’이라는 말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뒤에도 혁명들이 있었고 다른 건국자들도 있었다.
남북전쟁은 미국의 국민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유혈 참극은 전례가 없었으며, 전쟁의 결과는 남부의 노예제를 용인했던 지역 간 타협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타협은 최초 건국의 중요한 한 요소였다. 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해리 재파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건국의 참뜻을 지키고 회복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나는 그 주장을 인정하겠다. 그럼에도 전쟁은 각 주와 연방정부 사이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주민들, 그리고 다른 어느 주의 주민들도 더 이상 전국적인 합의와 어긋나는 생활방식을 만들어 갈 자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근대 산업의 부상은 새로운 경제 권력을 만들어 냈다. 이는 제임스 매디슨이 전제정치를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는 권력분립의 구상을 그토록 현명하게 생각해 냈을 때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을 시작으로, 우리는 경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행정국가를 세우면서 또 다른 혁명기에 들어섰다. 이 혁명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로 확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했던 총동원 체제로 영구화되었다. 루스벨트 자신도 193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자신의 새로운 조치들이 건국자들의 원칙이 옳음을 입증하고 그 원칙을 실현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지만, 설령 우리가 그 주장을 인정하더라도—나는 그럴듯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루스벨트가 정부와 경제 영역의 심대한 변화를 이끌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린든 존슨의 대통령 재임기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민권이라는 대의와 그의 ‘위대한 사회’ 정책들이 품었던 방대한 포부는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버지니아 슬림 담배의 옛 텔레비전 광고 문구처럼, “정말 먼 길을 왔군요, 당신.” 공화국 초기와 너무나 다른 오늘날의 정치·사회 질서 아래에서는, 독일 법이론가 카를 슈미트의 논저들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보다 오늘날 실제로 작동하는 헌법을 더 잘 밝혀 준다.
건국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별다른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자유사회의 취약성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화주의적 자치의 실험에 도덕적으로 절제하는 국민과 시민적 책무의 굳건한 전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존 애덤스가 말했듯이, “우리 헌법은 오직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국민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밖의 어떤 국민을 다스리는 데에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왔다. 그러나 그 여정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국민으로서 우리 자신을 다지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내가 지난달 글 「부패의 악취」에서 논했듯이, 21세기 미국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명예와 시민적 책무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치부의 명령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도덕적 품성과 시민생활이 타락한 만큼 건국자들의 정치적 천재성도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경고를 주는 한에서만 그들이 의미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힐스데일의 헌법의 날 기념행사에서 연설할 때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 건국의 놀라운 성취를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실제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존을 위해 혁명을 수행한다는 건국자들의 더 큰 목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들의 대담함을 본받아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옹호했다. 그는 그 혁명을 식민지 주민들이 오랫동안 누려 온 자유를 위협하는 제국의 새로운 요구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그 혁명은 보수적이었다. 선조들이 이미 이 대륙에 확립해 놓은 자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존된 것은 동시에 쇄신되었으며, 그것도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 건국자들은 미국이 품은 약속을 지키려면 이전에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리 헌법의 독창성에 경탄한다. 그 설계는 독창적이며 직관을 거스른다. 유럽의 법학자들과 정치이론가들을 만날 때면, 나는 종종 우리 정치체제에 대한 그들의 회의적인 시각과 마주한다.
명확한 주권 개념 없이 어떻게 일관된 통치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가? 논쟁이 되는 문제에서 최종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나는 좋은 질문들이라고 인정한다. (‘국민’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점을 회피하는 셈이다. 매디슨의 설계는 국민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통치 수단의 날을 무디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 체제가 작동해 왔으며, 그것도 오랫동안 작동해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담한 상상력으로 수행하는 보존과 쇄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다. 미국의 전통과 자유의 문화, 나아가 하나로 결속된 국민으로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격받고 있다. 런던의 오만한 군주가 아니라, 서로 결탁한 이념들과 막강한 이해관계 세력의 뒷받침을 받는 21세기의 강력한 현실들에 의해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일어난 경제적 변화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세계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세계화가 미국 노동계층에 미친 여러 영향은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한때 시장 바깥에 있었던 삶의 영역들이 이제는 돈벌이의 대상이 되었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젊었을 때 나는 여성들을 만나려고 교회 댄스 모임과 대학 파티에 참석했다. 이것들은 시장 바깥의 활동이었다.
듣자 하니, 오늘날에는 이 원초적인 목적을 데이팅 앱을 통해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이 앱들은 시민사회가 아니라 시장의 산물이다. 더욱이 시장 원리가 삶의 영역을 침범하게 만드는 경제체제는 전례 없는 부도 만들어 냈으며, 그중 상당 부분이 새로운 과두 지배층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날의 정치문화에는 도금시대의 악덕 재벌들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금권이 존재한다.
대규모 이주는 미국을 변화시키고 있는 또 다른 21세기의 현실이다. 현재 미국의 해외 출생 거주자 비율은 15%에 육박하며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다. 문화적·정치적 파장은 지대하다. 그리고 그 비율이 더 높아진다면, 옛 남부의 노예제 이해관계 세력과 유사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실제 시민들의 민주적 대표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건국자들이 인식했듯이, 투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늘어나면 이 문제는 어려워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미국 국민의 도덕적·종교적 품성에 관해 건국자들이 표명했던 우려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불행한 반전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가 국민 전반의 타락을 용인하고 심지어 지원하기까지 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다. 합법화된 대마초, 이른바 예측시장, 암호화폐. 이러한 사업들을 비롯한 여러 사업은 악덕을 부추기고 엘리트들이 동료 시민들의 자산을 빼앗아 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이 건국 250주년을 기념하는 미국이 직면한 도전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벅찬 목록임은 분명하다. 건국자들의 천재성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난관들과 그 밖의 난관들에 맞서야 한다. 우리 세계 제국이 국내 공화정의 작동에 가하는 압박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자유와 공화주의적 자치라는 최상의 전통을 보존하고 쇄신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건국자들처럼 대담하고, 큰 뜻을 품으며, 창의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상황은 어렵다. 이 나라에는 폐허가 된 것이 너무나 많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200여 년 전 건국자들의 장대한 시도만큼 대담하고, 지난 세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의 혁명들만큼 광범위한, 우리 정치체제의 깊고도 지속적인 쇄신이 필요하다.
다만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혁명은 그 성격에서 그들의 혁명과 크게 달라야 한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