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노래 「I Will Always Love You」가 휘트니 휴스턴의 히트곡이 되기 전, 돌리 파튼은 테네시주 피트먼 센터 출신의 어린 소녀였다. 그녀는 ‘리(Lee)’라는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땅을 소작하다가 훗날 자신의 작은 땅을 마련했으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잡역부로도 일했다.
가족의 집은 방 하나짜리 통나무집으로, 개틀린버그 동쪽 스모키산맥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가는 리틀 피전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었다. 돌리는 열두 자녀 가운데 넷째였고, 부모는 외할아버지가 설교하던 ‘기도의 집’ 교회에 다녔다.
기도의 집 교회는 오순절운동과 성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감정이 풍부하고 열정적인 예배로 알려져 있었다. 어린 돌리는 엘비스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처럼 작은 신자 공동체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가수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그 교회에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있었고, 돌리는 훗날 그 기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도덕 윤리에 대해 거리감을 드러내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마흔두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수많은 추모 글이 쓰였고, 그 죽음 앞에서 진보와 보수 모두가 슬픔으로 하나가 된 듯하다. 그러나 돌리는 단지 세계적인 가수이자 배우이며 자선가인 것만은 아니다. 내 아이들도 독서를 장려하기 위한 그녀의 단체 ‘Imagination Library’에서 매달 책을 받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돌리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승리와 비극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자본주의는 그녀에게 가난하고 소박한 출신 배경을 넘어설 길을 열어주었고, 훗날 그녀 자신이 표현했듯 “그저.. 농부의 딸” 이상의 존재가 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더 큰 존재가 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녀의 특징적인 금발 머리, 성형수술로 강조된 외모, 그리고 남부 계층의 모습을 연출하는 방식은 언제나 현실을 과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곧 ‘남부의 삶’ 그 자체를 상징하는 페르소나였다.
파튼은 남북전쟁 이후 형성된 ‘힐빌리(hillbilly)’ 고정관념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백인 쓰레기’나 ‘힐빌리’라는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바버라 월터스는 1977년 파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었다. “제가 자란 곳이었다면, 당신을 힐빌리라고 불렀을까요?” 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제가 당신 정강이를 걷어찼을 거예요.. 우리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품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골식 품격(country class)이었지만, 분명 대단한 품격이었어요.”
남북전쟁과 재건기 이후 형성된 대중의 인식과 충돌했던 이런 남부의 품격을 되찾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돌리는 고정관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부정적 꼬리표에 맞서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했다.
그녀가 남부 계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세계에 발을 들이던 당시, 그녀가 처음 명성을 얻기 시작한 미국은 국내의 시민적·문화적 충돌과 해외 전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첫 앨범 『Hello, I’m Dolly』는 1967년 9월에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바로 전날, 더 도어스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Girl, we couldn’t get much higher 얘야, 이보다 더 신날 순 없을 거야”라는 가사를 부르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짐 모리슨은 그대로 불러버렸다. 이는 당시 문화적 분열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건전한 미국의 가정생활은 자유연애를 내세운 히피운동의 흐름에 빠르게 잠식되고 있었다. 이 시기 인종적 긴장 역시 폭발 직전까지 치닫고 있었다. 이른바 ‘길고 뜨거운 여름’의 끝 무렵 미국 곳곳에서는 소요가 벌어졌고, 바다 건너 베트남의 정글에서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낯선 지역에서 젊은 미국 남성들이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스모키산맥 출신의 가수 돌리가 등장했다. 그녀는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통로를 제공했다. 그녀의 옷차림과 과도할 정도로 꾸며진 외모는 일종의 ‘모방적 과잉(mimetic overdose)’이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을 더 이상 축복이라기보다 속박으로 보기 시작한 여성들의 탈출 욕망을 자극했다. 가정주부들은 파튼을 보면서 자신들도 가정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1960년대의 제2물결 여성주의와 궤를 같이했다. 파튼은 여성주의 작가 베티 프리던의 말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했다. 프리던은 이렇게 썼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창조적 일을 하는 것이다.”
파튼의 창조적 작업, 특히 작곡은 그녀가 당대의 고정관념과 전통을 뛰어넘도록 해주었다. 여러 면에서 파튼은 가난에서 부유함으로 올라선 여성 음악인의 성공담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녀의 음악적 자녀들이 존재한다.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Kacey Musgraves), 마렌 모리스(Maren Morris), 캠(Cam)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여성성에 자주 반기를 들며 여성주의적 해방의 주제를 노래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상징이 되었음에도 파튼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삶을 살았다. 예컨대 트랜스젠더 운동에 대한 그녀의 지지는 여성을 돕고 여성의 권익을 증진하려는 그녀의 바람과 충돌했다. 여성들이 화장실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통과되자 파튼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그대로 살아갈 기회를 얻기를 바랍니다.”
파튼은 또한 동성애자 공동체의 지지자가 되었고 여러 자선사업에도 참여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그녀가 성장했던 힐빌리 문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의 이론가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a and Simulation)』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여러 단계를 거치다가 마침내 “어떠한 현실과도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게 되며, 그 자체로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고 설명한다.
파튼의 공적 자아도 이와 같은 궤적을 따라갔다. 한때 진짜 삶의 경험 위에 걸쳐 입은 의상과 같았던 ‘힐빌리 시골 소녀’라는 모습은 서서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그녀의 유일한 모습이 되어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파튼은 1986년 돌리우드(Dollywood)를 열었다. 방문객들에게 선별되고 연출된 ‘진짜’ 애팔래치아 산악지역의 삶을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진 테마파크였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디즈니랜드는 “나머지 세계가 실제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상상의 세계로 제시된다. 그러나 실상 로스앤젤레스 전체와 그것을 둘러싼 미국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으며, 초현실의 질서와 시뮬레이션의 질서에 속한다.”
돌리우드 역시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세련되고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진짜 남부의 삶’을 제공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설득력이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훨씬 고단한 경제 현실, 곧 한때 석탄산업과 섬유공장이 있던 자리를 저임금 관광업에 의존하는 일자리들이 대신하게 된 그 지역의 현실이 비교적 덜 ‘진짜다운’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돌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Jolene」이나 「The Last Thing on My Mind」 같은 고전은 컨트리 음악이 지닌 지속적인 유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미국의 심장부 사람들은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창법과 소박한 노래에 공감했다. 돌리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리우드나 대도시 출신의 가수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국의 흙에서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녀는 미국식 성공담의 주인공이라기보다 여성주의와 전통적 기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의 상징으로 변해갔다. 관객과 형성한 일방적 친밀감, 이른바 ‘준사회적 관계’는 그녀를 자신의 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사회는 결국 가면을 쓰게 된다.”
이 경우 돌리의 가면은 남부의 가치와 도덕은 빠진 채 남부의 품격만을 남겨둔 것이었다. 그녀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 청중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나 역시 그녀의 노래를 대단히 즐겨 듣는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전의 초기 노래들을 좋아한다. 바로 이 초기 앨범들, 『Just Because I’m a Woman』, 『Coat of Many Colors』, 『Jolene』에서 우리는 아직 현실에 발을 딛고 노래하던 파튼을 발견할 수 있다.
농부의 딸에서 미국의 아이콘이 된 여성, 가난에서 성공으로 올라선 이야기의 상징적 인물이 된 바로 그 돌리 파튼을 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