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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가톨릭 502] 부모 살해의 문화

2026-10-25 07:47 | 입력 : 리베르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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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라임 래드너 Ephraim Radner is Professor Emeritus of Historical Theology at Wycliffe College. 위클리프 칼리지 역사신학 명예교수


얼마 전 새로운 단어 하나를 배웠다. ‘데플로라시옹’(déploration)이다. 라틴어에서 직접 유래한 프랑스어로, ‘애도’를 뜻한다. 그러나 특정 음악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로는 내게 생소했다.

나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프랑스·플랑드르 작곡가 몇 사람의 작품을 살펴보다가 ‘애도’가 이런 뜻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질드뱅, 일명 뱅슈아(약 1400~1460), 요하네스 오케겜(약 1410/1425~1497), 조스캥 데 프레(약 1450/1455~1521), 니콜라 곰베르(약 1495~1560)가 그들이다.

오케겜은 자신의 스승인 뱅슈아를 위해 애도곡을 썼으며, 다른 이들 역시 각자의 스승을 위한 애도곡을 썼다. 스승과 제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면서 저마다 자신의 스승을 위해 울고 그를 기렸다.

이들이 앞선 작품의 소재를 의식적으로 차용했다는 사실, 곧 계승을 드러내기 위해 각자 자기 스승이 앞서 쓴 애도곡을 인용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서로 무관한 채 되풀이되는 형식적 관습이 아니라 실제로 이어진 사슬임을 보여 준다. 나는 슬픔과 기쁨 속에서 창조의 가계를 높이 기리는 이 끊임없는 전통에 경탄한다. 음악적 혈통에 바치는 이 헌정곡들은 모두 걸작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스승과 제자의 계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원로 학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료들과 그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의 논문을 한 권으로 엮는 기념논문집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이런 논문집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학자들 역시 이 장르에 갈수록 관심을 덜 보인다.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의 지적 유산을 한 세대, 어쩌면 두 세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조지 린드벡을 스승으로 기릴 수 있고, 그 뒤로는 아마 로버트 칼훈까지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너머는 모두 안개 속이다. 요즘 학자들을 더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스승의 작업을 이어 가려는 마음보다 부정하고 혁신해야 한다는 요구다.

해럴드 블룸은 유명한 저서 『영향의 불안』에서 스승이나 본보기가 작가에게 미치는 견인력을 추적하면서, 그러한 ‘영향’을 데플로라시옹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블룸은 오이디푸스적 살해 충동에서 생겨나는 창조적 긴장을 찬양한다. 참으로 ‘독창적인’ 시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을 향한 충동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를 피 흘리게 해 왔다.

우리가 부모 살해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규정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나를 즐겁게 해 준 음악을 남긴 저 고귀한 작곡가들의 계보에서, 데플로라시옹이 울려 주는 가족적 공명과의 대조는 뚜렷하다.

프로이트는 자녀가 부모를 죽인다는 자신의 이론을 펼치면서, 가족관계에 깃든 불안한 양가감정의 샘에서 길어 올렸다. 오이디푸스에 앞서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신들의 원초적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신통기』에서 우라노스의 학대는 크로노스로 하여금 그를 거세하게 하고, 크로노스의 폭정, 곧 제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행위는 제우스로 하여금 그를 몰아내게 한다.

플라톤은 『국가』 제2권에서 수호자들을 교육할 때 검열해야 할 이야기로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을 지목한다. 시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실이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침묵 속에 묻어 두는 편이 좋다”고 권고한다.

부모 살해의 유혹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고대 전통의 상당 부분을 관통하여 근대 초기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에게 얼마나 끔찍한 잔혹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키케로와 세네카 같은 저술가들이나 요한 크리소스토모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부모를 몰아내기보다 그들의 격정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이 현실에 접근한다.

바오로 성인의 권고는 이를 보편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에페 6,4). 또한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말 것입니다”(콜로 3,21). 아버지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관한 이 실천적 권고들을 떠받치는 것은 포괄적인 하느님의 명령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하느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임을 강조하셨으며(마태 15,4), 바오로 성인에 따르면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에페 6,2-3)이다. 그 약속은 ‘오래 사는 것’과 그 삶의 창조적 연속성이다. 여기에는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의 물리적 의미가 있지만, 정신과 영의 삶에도 적용된다.

아들은 아버지 없이 창조할 수 없다. 아들의 창조는 아버지의 힘이 이어지는 것일 따름이다. 이 창조적 흐름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힘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러한 일이 아버지 쪽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기예를 전수하며, 어머니와 할머니는 자신들이 지닌 사랑과 지혜의 유산을 물려준다.

후설–하이데거–아렌트–영브륄로 이어지는 철학적 계보와, 그 사이에 숨어 있는 매개자들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과 나는 앞선 이들에게서 이어져 나온 존재이지, 무에서 창조하는 새로운 계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저 이어져 나온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달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창조 자체에, 곧 하느님께서 빚으시는 가족과 관계, 대화와 인간의 삶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린다. 내가 내 부모의 자녀라는 사실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이는 내 몸과 말, 생각과 끄적이는 글에도 해당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 살았던 이들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하나로 통합된 선물의 한 측면일 뿐이며, 그 선물에 종속되고 그 앞에 책임을 진다.

이 선물은 부모 살해의 우리 시대에 새롭게 변형되었고, 어느 정도는 부정되었다. 근대 이전의 애도곡에서는 스승이나 후원자, 아버지와 같은 인물의 죽음을 심리적 질서보다 도덕적 질서 안에서 애도한다. 고인은 애도하는 사람보다 위계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상실된 것은 덕과 지혜, 연속성의 원천이며, 애도하는 사람은 충성과 감사, 공개적으로 그를 기릴 의무를 진다.

그 관계는 세대를 가로지르는 안정된 구조에 속하며, 애도곡 자체는 살아 있는 이들에게 올바른 감정과 처신을 가르친다. 슬픔은 구심적인 힘이 되어, 애도하는 사람을 물려받은 공동체 질서의 구조 안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그것은 “이 사람이 내 내면의 삶을 형성했다”가 아니라 “이 사람은 우리 모두를 형성하는 질서를 떠받쳤다”고 표현한다.

반면 현대의 추모는 심리적이며 개인을 개별화하는 문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것은 내면성을 우선하고, 개인의 감정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며, 관계를 위계적인 것보다 고유한 것으로 다룬다. 또한 고인을 질서 잡힌 우주 안에서 역할을 수행한 사람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으로 제시하며, 전통보다 자기 형성을 강조함으로써 연속성이라는 관념에 저항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슬픔은 원심적이다. 애도하는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어 개인적인 자기 규정으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나는 당신의 자리를 물려받습니다”가 아니라, 기껏해야, 그리고 흔히 그 정도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당신은 내가 지금의 내가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물려받는 일과 그 연결들이 지닌 축복을 깨닫고, 그렇게 내 계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참된 ‘애도’를 배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최근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나는 세계적인 음악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인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을 방문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십 대 초반에 1930년대에 망명한 헝가리인 요제프 바인가르텐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는 다시 리스트 음악원에서 위대한 교육자이자 작곡가인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에게 배웠다. 도흐나니는 리스트가 총애하던 제자 이슈트반 토만에게 배웠다. 내 음악적 삶은 비록 제대로 자라지 못했을지라도 리스트 자신에게서 맺힌 열매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열매인가. 듣고 연주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선율과 낭송조의 표현을 통해 내 모든 선조와 그들의 영혼이 이루는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 영혼들은 고뇌에 차 있기도 하고 평온하기도 하다.

이제 널리 알려진 ‘여섯 단계의 분리’ 이론, 곧 모든 사람은 여섯 단계 이하의 사회적 연결을 통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사슬」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처음 제시한 사람도 또 다른 헝가리인, 작가 프리제시 커린티였다. 비록 표면적일 뿐이지만, 그 요점은 비슷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세대를 잇는 감사가 우리 영의 건강과 창조적 활력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진실을 깨닫지 못했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 일찌감치 수학에 흥미를 잃었고, 수수께끼 같은 그 신비들을 대부분 거부했다. 어느 정도는 그러한 외면이 아버지와 거리를 두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삶은 그분이 소중히 여기던 경제이론에 적용되는 그러한 신비들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야코프 마르샤크를 거쳐, 다시 에밀 레더러를 통해, 경제학의 ‘오스트리아학파’를 세운 위대한 창시자 카를 멩거까지 이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스승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눈물을 흘렸다. 당시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그분의 열정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아버지와 그 열정은 모두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회한이나 유령 같은 잔영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으로 솟아올랐다.

계량경제학은 내 글에서 다루는 개념들과 별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적 은총이 이루는 행위로서 논한다면, 그것은 분명 내가 한 부모의 자녀이며 한 스승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모와 스승 역시 저마다 다른 이에게서 자신의 삶을 받았다.

기쁨에 찬 이 깨달음은 여러 축을 따라 움직인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직업적 활동, 예술, 혼인을 통한 접붙임, 곧 아내의 가족, 그리고 우정이다. 그것은 거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생겨나는 깨달음이다. 밀어내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고요 덕분에 세상은 훨씬 더 풍요로워진다. 사랑에서도, 아름다움에서도, 진리에서도 더 풍요로워진다. 오케겜은, 아마 가사도 자신이 썼을 텐데, 스승 뱅슈아를 이렇게 애도한다.

“죽음이여, 너는 네 화살로 기쁨의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혔구나. 선함의 본보기인 뱅슈아 위에 네 깃발을 펼쳤구나. ……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기도, 그것은 분노를 치유하는 위대한 해독제이며 감사의 귀감이다.

* 리베르타임즈에서는 '미국 가톨릭 지성(First Things)'의 소식을 오피니언란에 연재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편집위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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