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1-1)

- 단테와 신곡에 대한 느낌

 

■ 단테의 『신곡』(1-1)

 

신축년(辛丑年) 1월 우연히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박상진 교수의 강의를 통해 단테를 접하고 『신곡』을 읽어보고자 했는데, 설명절 연휴가 시작하기 전날 긴 명절연휴를 보람있게 보내보고자 김포중봉도서관에서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을 빌렸다.

 

처음은 쉽게 읽어보며 단테의 신곡을 접해 보고자 했는데 읽다보니 성이 안차 관련 서적들을 더 들여다 보게 됐고 설명절이 끝나고 바로 관련 책들을 추가로 도서관에서 빌려 참고하게 됐다.

 

그렇게 단테에 대해 접근하다가 강남교보문고에 들릴 일이 있어 갔다가 민음사에 나온 박상진 교수 번역본 『신곡』 셋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게 됐다. 계산하다 보니 10% 할인행사가 되는 책이라고 한데다 포인트까지 해서 기분좋게 싸게 사게 됐다.

 

단테의 신곡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어로 된 원문을 봐야겠지만 그것은 어려울 것 같고 그나마 번역본으로 단테의 생각에 접근해 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본이 나왔는데 역자에 따라 미세하게 번역이 다르다.

번역에 따라 글의 맛도 약간씩 다른데 독자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읽으면 될 것 같다.

완독은 차차 해가기로 하고 우선 전체적으로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를 기본으로 몇 권의 관련 책자를 참고로 하여 단테의 신곡에 대해 다가간다.

 

그동안 수없는 독자들이 단테와 신곡에 대해 서술했다.

더 훌륭한 독서후기를 남긴 분들이 많지만, 나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 크게 다름이 없는 신곡 독서후기를 남긴다.

 

우리 인생길 중후반에

올바른 길을 찾고자 헤메던 나는

단테의 신곡을 접하네.

  

          

 

내 나이 만 57세. 단테가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죽은 인생보다 한 살 더 살고 있는 나는 인생 중후반기에 단테의 신곡을 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이 나이가 돼서야 단테를 읽는다는 것에 나 자신이 부끄럽다.

아마도 신곡이라는 제목에,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무거운 주제에다 종교적인 책이 아닌가 하여 감히 엄두를 내지 않았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단테의 대서사시를 알고 읽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56세의 나이로 죽었다.

단테가 출생하던 때는 몽골의 유럽 정복기가 끝나고 안정기로 접어들던 시기이고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로 산재하던 시대, 십자군전쟁이 마무리되던 시기였다.(마지막 십자군전쟁, 10차 1272~1291) 한반도에서는 몽골에 대항하여 강화도 항전을 하던 고려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단테가 신곡의 처음을 시작하면서 첫 줄에서 ‘인생의 반고비’라고 표현했다.

지옥 여행을 시작한 단테의 나이가 35세였고 이를 반고비라 했다면 적어도 단테는 70세까지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테는 56세에 질병(말라리아라고 함)에 걸려 일찍 세상과 헤어졌다.

아마도 오랜 망명생활로 그의 인생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고 신곡과 같은 대작을 남긴 그의 건강이 그리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단테는 자신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위대한 천재의 삶에 대한 여정이 그리 자세히는 전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전한 몇 가지 작품으로 우리는 ‘베아트리체’라는 영원한 연인을 알게 되었고, ‘신곡’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보고 있다.

 

신곡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많은 저작과 자료로, 더구나 지금은 인터넷 여기저기에 남아있으니 그에 넘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혹독한 현실 투쟁의 장이다.

현실 정치에 몸담았던 단테가 겪었을 고뇌와 그리고 핍박이 고독한 천재에게 어떻게 다가갔을까?

그 핍박으로 인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볼 수 있게 됐으니 마치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수많은 역저를 남긴 것과 같다.

위대한 천재들의 불우한 삶으로 우리는 지적 충만을 만끽하니 큰 빚이 아닐 수 없다.

 

        

 

단테 당시는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교황청, 즉 황제와 교황이 대립하고 있었다.

남쪽의 교황과 북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에 끼여 있던 피렌체는 중산층을 옹호하는 교황파 겔프당과 상류층을 대변하는 황제판 기벨린당의 대립으로 그 시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단테는 겔프당에 속해 젊은 나이에 피렌체 최고권력기구인 6인 통령의 한 사람으로까지 선출되기도 했었다.

 

겔프당은 다시 귀족파 흑당(네리)과 상인파 백당(비앙키)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단테는 당시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피렌체의 독립을 주장했던 백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정치투쟁에서 백당은 패퇴하였고, 결국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된 단테는 1302년 흑당에 의해 피렌체에서 쫒겨나고 19년을 망명지에서 보내고 피렌체와 가까운 항구도시 라벤나에서 세상과 이별하고 이승으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이경직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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